< 관 계 >
- 단풍이 들기 전에

옥 영 경


1.
“스무날이나 기다렸어.”
“날?”
“그럼 누구?”
“왜?”
“친구가 필요했거든. 촉촉한 저 언덕길을 같이 오르고 고운 자두 꽃잎 사이도 함께 누빌, 그리고 긴 장마 사이사이 비치는 무지개도 같이 볼 친구 말야. 혼자서 보고 있기엔 너무 아름다웠거든.”
“...”
“난 네게 도움을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르겠어. 너도 알다시피 난 이제 막 세상을 본 걸.”
“괜찮아. 도움을 주는 건 먼저 배운 사람이 할 도리거든. 배운다는 건 나누는 거야.”
“나도 네게서 배워 또 나누는 거고?”
“그래.”
달팽이 돌돌이는 순순이가 태어나길 오래 기다렸습니다. 연하고 어린 잎 사이를 누비는 틈틈이 흙에 덮여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구멍 안을 날마다 날마다 보았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이랑 꼭 닮은 그 곳에서 자기가 깨고 나왔던 바로 그런 알이 보였거든요.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알 하나가 금이 가더니 얇은 껍데기가 그 안에 또 보이는 겁니다. 침을 꼴깍 삼키며 기다리니 머리 하나 쑥 나옵니다. 몸보다 큰 머리를 뻗으면서 알 속에서 순순이가 나오긴 했는데,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땅이 말라서 그런가 봐요. 침을 뱉어주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도 바삐 더듬이를 움츠렸다 폈다 하며 배를 채우고 구멍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비가 오거든요. 그러면 구멍 안에도 비가 닿을 테고 축축하게 젖어 부드러워진 흙 틈새로 순순이가 땅 위로 올라올 수 있을 겁니다.
눈 잠깐 비비는 사이 껍데기 위에 한 바퀴 반 감긴 소용돌이 무늬가 있는 어린 달팽이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순순이!

2.
돌돌이와 순순이는 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건너기도 하고 곧게 뻗은 줄기를 오르기도 합니다. 날아다니던 나비들도 어디로 가고 비를 싫어하는 벌레들이 풀이나 돌 밑에 숨어버린, 이런 날은 더 신납니다. 연하고 어린잎들도 쑥쑥 자라 먹이는 어디나 널려있거든요.
부른 배로 잎사귀 뒷면을 기는 것도 지루해졌습니다.
“우리 줄타기 하자.”
“나도 할 수 있을까?”
“납작한 다리를 말아서 양쪽을 꽉 끼면 가느다란 실도 잡을 수 있어. 찰싹 달라붙는 발로 기어가는 거지.”
“겁나.”
“내가 먼저 할게.”
돌돌이가 먼저 줄을 건넜습니다.
“이쪽으로 와!”
순순이도 가만가만 가봅니다.
“난 집이 너무 무거워. 이렇게 땀이 비 오듯 하는 걸.”
“그러면 거꾸로 매달려 와 봐.”
“거꾸로?”
순순이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드는데 돌돌이는 계속 고함을 칩니다.
“그래. 왜 집이 꼭 위에 있어야 되지? 거꾸로 타고 오란 말야.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는 게 세상 이친데, 네가 그 이치를 거스르니 힘이 드는 거란 말야.”
“어지럽지 않을까?”
“해 봐.”
“무서워.”
미끌! 순순이가 그만 떨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줄을 잡고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와 봐.”
다 건너온 순순이를 돌돌이는 꼭 안아주었습니다.

3.
“나는 귀가 잘 들리지가 않아.”
“나도 그래.”
“그게 아니라 나는 많이 들리지 않는단 말야. 처음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줄 알았어. 그 때 처음 네가 내게 말을 걸었을 때도 난 온 마음을 모아서야 겨우 들을 수 있었거든. 아마 네가 했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어.”
“나도 그렇다니까.”
“그게 아냐. 난 아주 많이 소리가 들리질 않는단 말야. 넌 내가 오는 소리를 금방 알잖아. 바람이 부는 것도 알고 사람 발자국 소리도 다 듣잖아.”
“순순아, 나도 잘 들리지 않아. 그런데도 어떻게 아냐구?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공기가 움직이는 걸 느낄 수가 있거든. 물결처럼 움직인단 말야. 그 움직임으로 나는 소리를 알게 되는 거야.”
“넌 내 말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알아듣는데?”
“그건 말야, 으음 그건 말이야, 마음을 열어서 그럴 거야. 나는 네게로 마음의 문을 열어두고 있거든. 거기로 네 말이 고여 오는 걸. 마음이 닿으면 말도 닿는단 말야.”
“...”
“눈도 그래.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물건을 알아볼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린 빛을 느낄 수 있잖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던? 꼭 눈으로만 뭔가를 가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난 말이야, 네 모습을 가릴 수 있어, 다른 친구들 속에서 말이야, 마음으로 가릴 수가 있어.”
“나는 더듬이로 너를 아는데...”
“그래 난 더듬이를 쓰지 않고도 순순이 널 알아. 내 친구니까, 마음의 눈으로 너란 걸 알아챌 수 있어.”
“...”

4.
비가 갠 날 밤입니다. 오뉴월 무더위가 한 풀 꺾였습니다.
달팽이들이 비에 젖은 나무줄기를 줄줄이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 아흔 아홉 마리, ...
곧 잔치가 열립니다. 모두 들떠있습니다. 이제 스무 가지 장미향을 서로에게 건네는, 그래요, 어른이 되었다는, 그래서 짝을 찾아 춤추는 잔칫날입니다.
“나는 내 몸이 여자 구실도 할 수 있고 남자 구실도 하는 줄 알았는데...”
순순이가 말했습니다.
“맞아. 그렇지만 우리도 다른 세계 이들처럼 짝을 지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단다.”
돌돌이가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때 순순이 앞으로 장미향을 보내는 이가 있었습니다. 순순이도 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둘은 서로 다리를 붙이기도 하고 입으로 핥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도 나누구요. 아주 오랫동안 말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둘을 보며 돌돌이는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렇지만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써 마음에 드는 다른 이를 찾았습니다.
돌돌이도 짝을 만났습니다. 둘은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가느다란 관을 뻗어서 서로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순순이도 돌돌이네를 보았습니다.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그 때, 돌돌이와 순순이의 눈이 닿았습니다.
“미안해.”
돌돌이와 순순이는 서로 함께 있던 상대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긴 시간을 서로 알고 지낸다는 건 참 아름다운 일이야.”
“그래, 나도 네 눈을 보면서 네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
둘은 기뻤습니다.
“나는 말이 되는 달팽이를 만나고 싶었어.”
“이 세상 다른 누가 아니라 꼭 너여야만 했어”

5.
한 달이 지났습니다. 순순이와 돌돌이 뱃속에서 많은 알들이 자라나 알을 낳을 곳을 찾았습니다.
“축축한 흙이야!”
“낙엽도 있어!”
둘은 머리부터 땅 속으로 파고들어 흙 속에 한 알 한 알 작고 흰 알을 낳았습니다.
“이제 낙엽과 흙으로 구멍을 가리면 돼.”
그들은 다시 줄타기를 하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건너고 곧게 뻗은 줄기를 올랐습니다. 연하고 여린 잎들도 찾아냈구요.
“금새 한 달이 지났네.”
“어린 새끼들이 세상으로 나왔겠다. 투명한 껍데기를 등에 짊어지고 말야.”
“아주 작을 거야.”
몸도 껍데기도 비쳐 보일 겁니다.
“껍데기 위에 한 바퀴 반 감긴 소용돌이 무늬가 있을 거구.”
“작지만 머리와 몸을 모두 넣을 수는 있을 거야, 우리가 그랬듯이.”
“비가 오는 날, 축축하게 젖은 흙 틈을 따라 땅 위로 나오겠지.”
“그래, 그리고는 푸르고 연한 잎을 골라 먹기 시작할 거야.”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옵니다. 알이 걱정입니다. 어린 달팽이에게는 더위와 메마름이 가장 무서운 적이니까요.
“얼마 남지 않은 장마철이 가기 전에 열심히 먹어서 제대로 자라야 할 텐데...”
걱정하는 순순이에게 돌돌이가 말했습니다.
“걱정 마. 우리가 아니라 그의 친구들이, 선배들이 우리보다도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어.”
“내 곁에서 네가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 세상은 스스로 배우는 거야. 우리가 말로 하는 것보다 그 아이들이 세상과 만나면서 스스로 깨치는 게 더 많을 거야.”
“음...”
“우린 아이들을 세상에 나오게 하는 몸이었을 뿐이야. 네게서 태어난, 또 내게서 태어난 그 아이들이 우리만의 아이들이 아니라 이 세계의 아이들이란 말이야. 우리 맘대로 키우려 들어선 안돼.”

6.
날이 더워졌습니다. 장마가 끝난 것입니다. 공기는 금새 건조해졌습니다. 돌돌이와 순순이는 땅 가까이 가거나 낙엽 밑 축축한 곳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더워.”
“우리도 다른 친구들처럼 높은 나무 그늘진 곳에 집을 착 달라 붙여 놓고 쉴까?”
“그러면 서로 이렇게 바라볼 수가 없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헉, 너무 더워서 말할 수조차 없는데...”
“그럼 몸을 껍데기 속으로 더 움츠려 봐.”
“아아, 그래도 너무 더워.”
“침을 내서 집 대문에 얇은 막을 쳐 봐.”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 돌돌아.”
“그럼, 저 아래 돌 밑으로 가자. 아님 나무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
“이제 더는 같이 걸어 다닐 수 없는 거야? 더는 저 물 젖은 잎사귀 사이를 너랑 같이 기어볼 수 없는 거냐구?”
“아니, 오래 같이 쉬는 거야.”
“언제까지?”
“비가 올 때까지.”
“비가 오긴 와?”
“그럼.”
“그걸 어떻게 알지?”
“세상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해 많은 걸 준비하고 있거든. 그건 우리 손이 닿는 게 아니야. 우리가 바다에 살았던 그 아득한 옛적부터 세상의 이치가 그런 거야. 우리가 크게 욕심내지 않고 필요한 것만 가질 때 그 이치는 계속될 수가 있어. 자기 창고 안에 자기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쌓아두면, 그건 남이 잘 쓸 수 있는 걸 자기만을 위해 그러는 거니까, 그럴 때 세상의 이치가 어긋나곤 하지.”
“필요한 것만을 가지는 우리들에게 세상이 분명히 비를 줄 거란 말이지?”
“그럼. 우리가 계속해서 가지고 가지고 해 마침내 바닥나고 없어질 때까지 뭔가 쓰려는 욕심을 갖지만 않으면 세상은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들은 주는 거야.”
“그래, 기다릴 수 있어.”
그때 돌돌이가 나무 구멍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정말 더운 한낮입니다.

7.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시원한 밤입니다.
“이 집이 너무 무거워. 나무 구멍 안에서 얼마나 답답했다구.”
“...”
“자주 이 집을 내려놓고 싶어져.”
“누구나 삶에 짊어져야 할 짐이 있는 거야.”
“넌 늘 그런 소리만 하는구나.”
“이 짐이 우리를 보호해 주기도 하잖아.”
“...”
“얘, 가만!”
곤봉딱정벌레입니다. 더듬이를 휘휘 내젓고 있습니다.
“어이, 돌돌이, 순순이!”
아래를 지나가던 친구 하나가 그것도 모르고 우릴 부릅니다. 팔장 끼고 같이 걷고 있는 달팽인 본 적이 없는 친구입니다.
“야, 조심해!”
그러나 그 말이 닿기도 전 딱정벌레는 날카로운 턱으로 그의 집을 깨부숴버렸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가 위험을 알아채기도 전 이제 딱정벌레는 머리를 새 친구 껍데기 속에 처박고 그만...
“아아, 어쩌면 좋아...”
“기억하렴. 가장 좋은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일 수도 있어.”
“...”
“소나기 내려 시원해졌다고 한숨 놓고 맘껏 신나할 때 곤봉딱정벌레며 꽃개똥벌레에게 잡아먹히는 경우가 허다해.”
“우리가 남새를 내지 않으면 되잖아.”
“...”
“더듬이로 우리 냄새를 맡는 거니까.”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 냄새를 가지고 있어. 자기 색깔처럼. 그걸 덮을 순 없는 거거든.”
“...가장 좋은 때가 가장 위험한 때!”
순순이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8.
바람이 서늘해졌습니다. 단풍이 들고 마침내 그 잎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들을 단풍 들기 전 돌돌이와 순순이는 열심히 먹었습니다.
날이 자꾸 추워집니다.
“견디기가 힘들어.”
“서둘러야겠다.”
돌돌말린 껍데기 속에 몸을 움츠리고 여름처럼 집 앞에 얇은 막을 칠 때입니다. 바람이 더 거칠어졌습니다.
“하지만 매서운 추위와 몸이 마르는 것이 이걸로 막아질까?”
“막을 치고 또 치고 하는 거지.”
“먹을 것은 충분할 테지?”
“그럼. 무언가를 준비하는 건 참 기쁜 일이지 않니? 지난 여름날은 이 날들을 예비하고 있었어.”
막을 칠수록 말소리는 멀어집니다. 그 막의 작은 구멍으로 가볍게 숨을 쉬면서 둘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럼. 다시 해 나고 비 오고 그러듯이 우린 또 사는 거야.”
“그 사이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순순아, 그렇더라도 세상은 아주 오래 계속 될 거야. 내가 아니어도 또 누군가가 이어가는 거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너무 슬퍼.”
“그렇지도 않아. 또 다른 세계로 간다는 것일 뿐이야. 그 세계는 또 그 세상이 있는 거구.”
잠이 몰려옵니다.
“아주 아주 긴 잠을 자고 나면 다시 훈훈한 바람이 불거야. 겨우내 마른 잎과 돌 밑에 있던 우리들에게도 봄비와 바람이 손을 내밀어줄 거야.”
돌돌이의 목소리가 순순이에게 아주 아득하게 들렸습니다.
밖에는 첫눈이 내립니다.

(1998.4.16.나무날.05:40 처음 쓰고 1999.1.14.나무날.05:55 손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