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 9.나무날. 볕 좋은

조회 수 675 추천 수 0 2014.10.28 15:39:32


MBC의 독서관련 특집 프로그램 하나 촬영 중.

어제오늘 이틀에 걸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류옥하다가 드디어 다니게 된 제도학교에서,

그리고 오늘은 물꼬에서.

덕분에 아이의 지나간 사진들도 들추게 된.

몇 장 있지도 않은.

사진만 남더라, 그 말이 실감 조금 되었던.

아이들이 무슨 걱정이랍니까, 큽니다, 그것도 잘.

우리 어른들 삶이야말로 염려되지요.

비틀거리지 말 것, 당신도 나도!

아이들이 보고 있잖아요.


촬영이지만 방문자 있을 적처럼 별스런 일 없이 돌아가는 일상은 일상대로.

고구마도 좀 캐고

아이랑 오랜만에 노닥거리고

밥해 먹고

저녁에야 끝난 촬영,

아이를 기숙사로 실어주며 촬영팀들도 떠나고

재봉도 하고,

운동장 패인 곳에 자갈도 좀 깔고.


그리고, 잠시 손에 잡은 책에서

천천히 읽게 되는 대목 하나 옮겨봅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학교는 부모들과 공모하여 유년기 소년기를 나누어놓고 성년으로 인정할 때까지 보호대상으로 묶어놓겠다는 제도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등교시간부터 하교시간까지 일정한 시간을 규율에 묶여서 견디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법입니다. 규율을 어긴 자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쫓겨나야 합니다.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회는 규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규율을 어기면 학교에서 퇴학당함으로써 더 좋은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누릴 기회를 박탈당한 우려가 있지요.

독감이라도 걸려서 하루나 또는 이틀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던 날 우리는 은근히 놀라게 됩니다. 다른 아이들이 차가운 아침공기 속에 입김을 하얗게 뿜어대며 종종걸음으로 등교하는 모습을 창 너머로 훔쳐보며 저것이 내 꼴일 텐데, 하며 놀라지요.

정오경에 동네 근처 네거리에라도 나서면 국민하교 꼬마들에서부터 우리 또래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거의 남김없이 자취를 감춘 처음 보는 시간과 거리의 풍경에 또 한번 놀랍니다. 아줌마들 노인들 행상들 그리고 시장 상인들만이 어슬렁거리며 오후의 본주할 때를 준비하고 있지요. 말하자면 행세할 만한 사람들은 이 시간에 여기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나니까 자기 시간을 스스로 운행할 수가 있었지요. 가령, 책을 읽었어요. 그 내용과 나의 느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정리가 되어서 저녁녘에 책장을 닫을 때쯤에는 갖가지 신선한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또 어떤 날에는 어려서 멱 감으러 다니던 여의도에 빈 풀밭에 나가 거닐었지요. 강아지풀, 부들, 갈대, 나리꽃, 제비꽃, 자운영, 얼레지 같은 풀꽃들이며, 논두렁 밭두렁의 메꽃 무리와, 풀숲에 기적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주황색 원추리 한 송이, 그리고 작은 시냇물 속에 자갈 사이로 헤집고 다니는 생생한 송사리 떼를 보고 눈물이 날 뻔했거든요. 눈썹을 건드리는 바람결의 잔잔한 느낌과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행렬, 햇빛이 지상에 내려앉는 여러 가지 색과 밀도면 빛과 그늘. 그러한 시간은 학교에서 오전 오후 수업 여섯 시간을 앉아 있던 때보다 내 삶을 더욱 충족하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이 이런 충족된 시간들이 아니라 제도를 재생산하는 규율이 시간 속에서 영향 받고 형성된다는 것에 저는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성장기라니요. 어느 책에 보니까 감옥이나 정신병원은 그러한 기구를 통하여 교정하려고 했던 바로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십 년 이상이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거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정신이상자들이 정상적인 환경에 놓인 지 불과 몇 달 만에 대부분이 완치되었다지요. 자연스럽게 그냥 놓아두는 것의 힘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저는 월말 학력고사의 피해자가 저 한 사람이 아니리라 믿고 있습니다. 복도에 석차와 점수가 공개되어 붙을 때마다 수치심이나 모욕감은커녕 모두 부질없다는 비웃음이 입가에 떠오르지요. 숫자 몇 개나 부호 또는 단어 몇 마디를 적어나가던 시험지의 빈칸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이것은 적응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훈련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장기에 얼마나 잘 순응하는가에 따라서 직업의 적성이 결정되고 어느 등급의 학교를 어느 때까지 다녔는가에 따라 사회적 힘이 결정되겠지요. 이러한 위계질서가 권려과 재산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를 테면 저는 고등수학을 배우는 대신 일상생활에서의 셈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주입해주는 지식 대신에 창조적인 가치를 터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인식은 통일적이고 총체적인 것이며 이것저것으로 나눌 수 없다고 하던데요. 자유로운 독서와 학습 가운데서 창의성이 살아남다고도 합니다. 결국 학교교육은 모든 창의적 지성 대신에 획일적인 체제 내 인간을 요구하고 그 안에서 지배력을 재생산하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모두가 신사의 직업을 우리들 앞에 미끼로 내세우지만 빵 굽는 사람이나 요리사가 되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독 짓는 이는, 목수는, 정원사는, 또는 아무일도 택하지 않는 것은. 피아노 배우기가 여러 단계의 기계적인 손동작을 강조하는 교본들 대신에 예를 들면 처음부터 직접 ‘등대지기’라든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같은 노래를 연습하면 안 되는 것인지. 굳어져 버린 코 큰 외국인의 석고상을 그리기보다는 학급 친구나 아우의 얼굴 또는 늙어신 고향의 할머니를 그리면 안 되는 것인지. 이것들은 제도 안의 최소한의 변화인데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선택의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저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는 두려움에 몸이 떨리기도 하지만 미지의 자유에 대하여 벅찬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물론 힘들겠지만 스스로 만든 시간을 나누어 쓰면서 창조적인 자신을 형성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결국 제도와 학교와 공모한 틀에서 빠져나갈 것이며, 세상에 나가서도 옆으로 비켜서서 저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자퇴 이유입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여러 가지 좋은 영향을 주셨고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P.81~85)

;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문학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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