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1.흙날. 맑음

조회 수 844 추천 수 0 2014.10.31 23:28:49

 

그윽한 가을볕입니다.

집 뒤란 언덕배기 구절초며 쑥부쟁이며

마음결을 살펴주는 것들이 곳곳에서 고맙습니다.


학교 마당엔 만국기 펄럭입니다.

아이들이 떠난 산마을,

오래 전 문을 닫았던 학교에서

이곳에 어린 날을 묻었던 이들이 모여

경로잔치를 하기로 한 날입니다.

음악소리 높고 차일 아래 밥상을 둘러싸고 환담도 넘치는,

그리고 놀이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어릴 적 가을운동회 풍경이 그리 되살려지고 있었지요.


방문하신 분과 달골 둘레를 좀 살핍니다.

당신 잊고 있을 때도 나 여기 있었노라,

마치 그리 말하듯 뱀 허물 하나 바깥수돗가에 벗어져 있었는데,

그것도 치워주시고,

달골에도 어디 해먹 하나 달까 둘러도 봐주시고,

학교에 내려와서는 그네와 해먹의 끈들을

확인하고 다시 매고 해주셨지요.

사람 손 있을 적 얼른 일도 하나 더합니다.

여자해우소에 오래 세워져 있던 교탁 둘을 꺼내

(그게 벌써... 96년 가을이었습니다)

털고 닦고 칠했지요.

젊은 사람들 불러 가마솥방 밥상머리 무대 자리에

피아노 다시 꺼내고 교탁 놓고

그 위로 다시 피아노 올려놓고.

나머지 부분은 나무를 짜서 무대를 마저 완성해야지요.

아무래도 네팔을 다녀온 뒤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


벗이 찾아왔다가 관심 있을 거라며 오려온 신문을 내밀었습니다.

한 주 전의 신문이더군요.

물꼬에서도 보는 신문이지만,

여기서 신문이란 불쏘시개이거나 덮개이거나 깔개이거나 싸개.

“인생은 마흔살까지입니다.”

오십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고

그래서 정말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며 영화판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자신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지요.

지독한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살다가

마흔한 살에 소설 <고래>로 마술적 리얼리즘 전혀 새로운 이야기꾼 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천명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인터뷰 말미에 최근 읽은 프랑스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더군요.

“인생이 오십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인생이 사십에 끝난다는 사실만을 빼고.”


김윤식 선생 글도 있었습니다.

비평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공감과 감동이라 믿는다셨지요,

특히 새로운 것을 낯설다고 물리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를 강조하시며.

지금도 하루 원고지 10장꼴의 집필 리듬을 유지하고 있다는 노학자.

‘그러나 문학과 책의 장래에 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안타까움을 표하지도 않았다.

“제행무상아니겠소? 우리 시대는 책 속에 중요한 사상과 내용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새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책 안 읽는 풍토를 개탄한다는 이들도 있는데,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삶이 바뀌었으니까.”’

비평의 원칙만 그러하겠는지요.

관계의 원칙도 공감과 감동이라 할 수 있겠는.


사람들 떠나고,

서둘러 지는 해에 잰 걸음으로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늦은 저녁,

방문자에게 녹차와 청차를 내며 가을날 하루를 닫았더랍니다.

청차는 역시 뜨거워야...

날이 차지니 차 맛이 더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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