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0 간송미술관 들머리.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간송까지 걸어가는 성북동 길은 고즈넉도 했던.
미술관을 걷기로 한 날입니다.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 ‘추사정화’전, 불교 중앙 박물관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전,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로 이어질.
1971년 가을 간송이 첫 전시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예약제로 운영한다던 올해입니다.
그리고 길게 늘어섰던 줄처럼 예약도 그리 금방 차버렸지요.
다행히 여섯의 동행이 가능했던 건 발 빠른 벗이 있어.
고맙습니다.
벗의 집에 들어서면 ‘계산무진(谿山無盡)’이 걸려 있습니다.
추사체의 완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지요.
파격적인 결구법이나 배치법이 최고의 완성도를 드러낸다는.
‘가운데 부분을 휑하니 비워놓은 채
계곡 물이 콸콸 용솟음치듯
서로 크기가 다른 글자 획들이 서로 어슷비슷 겨루는 기세가 대단하다.
뫼 산(山)자의 중간 삐침을 사람 인(人)자로 붙인 건 추사이기에 할 수 있는 재치다.’
탁월한 조형성은 이런 설명 아니어도 눈을 끕니다.
추사의 글씨는 발랄합니다.
언제 봐도 새롭습니다.
산에 오르고 또 올라도 또 만나는 선물들처럼
추사의 글씨가 그러합니다.
간송이 소장한 추사의 서예작품을 중심으로 그림을 곁들여 모두 44점,
추사가 30대부터 71세로 타계할 때까지 쓰고 그린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타계 두 달 전 썼다는 예서대련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물꼬 삶이네 싶은.
‘침계’도 있습니다.
추사가 제자 침계 윤정현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글을 부탁받았으나
‘침’자의 예서 전형을 찾지 못해 결국 예서·해서 합체로 써주었다는.
19세기 초 해남 대흥사 설암스님이 남긴 게송이
추사의 ‘설암게’로도 남았습니다.
‘서릿발 같은 한자 글씨들 사이로 뼈대만 남은 코끼리가 뛰쳐나온다. 휙 말린 코와 세 개의 다릿발, 길쭉한 꼬리. 코끼리 모양을 본떠 변형시킨 상(象)자의 원래 모양이다. 이 아득한 옛적 글자를 정갈한 행서체 문장 속에 암호처럼 던져버렸다. 문장의 뜻이 심오하다. ‘바다 밑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곤륜산에서 코끼리 타니 백로가 고삐를 끄는구나.’ ’
하루 종일도 놀겠는 추사체 앞이었더이다.
밥을 먹은 뒤
불교 중앙 박물관의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전은 다녀온 이도 있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수년 전 한 기업인의 후원으로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눈에 익었던 것도 몇 점 건너와 있었지요.
얇지만, 강하고 백색바탕에 투명한 빛을 내는 청화백자는 최고의 기술력을 요구한다지요.
백자토를 섞고 주물러 다양한 모양새의 그릇을 만들고
코발트 안료로 표면에 그림과 무늬를 그린 뒤 1300도 이상 굽는다고.
15세기 조선 청화백자의 태동부터,
16세기 일어난 전란으로 흐름이 끊어졌지만,
18세기 영·정조대 문화중흥기에 절정을 이루고
19세기의 대량생산기와 현대까지의 흐름을 다 볼 수 있었던 자리.
하지만, 19세기 만인의 것으로 대중화했다고 강조하지만,
당시에도 청화백자는 서민들은 구할 수 없는 고급품,
게다 중국 청화백자를 왕실에서 앞장서 대량 수입도 했다는 뒤안도 있었다 들었습니다.
도자기 사이를 걸으면서
야나기 무네요시를 또 들먹이지 않을 수 없더군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완벽하여 저 높이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고,
일본은 색채미가 깔끔하여 옆에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
한국은 선이 아름다워 어루만지고 싶어지게 한다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예술을 논하기보다 말잔치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특히 조선 미술이 "슬픈 비애의 미"라는 데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는.
또 여전히 그의 말을 인용하는 화단도 썩 불편한.
우리 도자기를 우리 화단에서 평하는 글을 읽고 싶어졌더랍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선 땅콩을 거두어 마당에 널고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