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벽에 걸 만한

상상의 그림이나 사진들도 흔하겠지만

내가 아는 시인의 방 벽에는

춘하추동, 흑백으로 그린

녹두장군 초상화만 덜렁 걸려 있다.

(중략)

까짓것 희미한 자기 혈육 따져 무엇한다더냐

그 녹두장군을 자기네 집 조상으로 삼는단다.

내가 잘 아는 시인 한 사람은.


(조태일의 ‘내가 아는 시인 한 사람은’ 가운데서)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바리톤 김동규)

노르웨이 Anne Vada 의 노래 Dance towards Spring이 자주 들리는 시월,

지난 봄날 하루처럼 산마을을 벗어나 전주를 1박2일 걷기로 했습니다.

잠자리 문제로, 그리고 더 깊은 나눔을 위해 열 사람으로 자리를 제한하게 되어

일찌감치 마감됐더랬지요.

‘왜 우리는 전주객사에서부터 전주를 걷기 시작하려는 걸까요?

조선 역사가 태동한 거리와

한국근대 민족민주운동의 총 본산 동학농민혁명유적지를 따라 걸으며

오늘 우리들의 삶을 찬찬히 짚어보려 합니다.

한편, 그리 꼭 무얼 하잖고 그저 멀리 사는 물꼬식구들 얼굴만 보아도

눈 시릴 시간이지 않을지요.’(빈들모임 공지에서)


11:30 풍패지관(전주객사).

고려 이후 각 고을에 설치돼 외국 사신의 숙소나 연회장으로 썼던 객사는

조선시대에는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한 장소.

전주 한복판에서 만인의 만남의 장소로 사용된다는 객사 마루는

객이 도시를 걷기 시작하는 지점으로도 맞춤한 곳.

그렇게 사람들을 맞고,

전주 나들목 현판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현판의 전주라는 글씨가 들어오는 쪽은 모음이(어머니 품)

나가는 쪽은 자음(아들아, 세상을 향해 한껏 나아가라)이 크다는.

한옥에 왔으니 객사를 빙 돌아가며 한옥의 구조도 익혀보고

전주회관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비빔밥도 어디에서 먹는가가 중요하지! 물론 누구랑 먹느냐도!”

저녁에 탄 택시기사 아저씨, 거기 일품이라며 잘 갔다신.


옛길을 걸어 전주감영터 선화당을 지납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고종의 특사와 동학 지도부가 마주 앉아 협상을 하던 곳.

그 시절, 한낱 농민들이 왕의 사절과 한 자리에서 마주하였다니.

동학농민혁명이 어떤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 아닐는지.


남문인 풍남문에 이르지요.

전주성의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이곳 기둥은 2층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합니다.

비잔틴과 로마네스코가 어우러진 전동성당도 놓칠 수 없습니다,

천주교 한국 최초의 순교지라는.

성벽을 허물며 나온 돌이 여기 주춧돌로 쓰였다던가요.

순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았을 그 돌이 말입니다.

얼마 전 전주를 다녀간 윤지샘과 연규샘 왈,

“누구랑 오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어디나 교동이 있지요, 향교가 있던 마을이라 짐작이 어렵지 않은.

여긴 전동이 있습니다.

경기전이 있는 동네라는 뜻.

거기 이릅니다.

태조의 어진이 있는 이곳에는 ‘전주사고’가 또한 있지요.

조선 개국 초 네 곳에 있던 역대 실록보관소.

한양 춘추관 충주 성주 세 곳이 타고 전주사고만이 남았는데,

정유재란에 이 실록각마저 탔다 합니다.

그 직전 실록을 지고 다니며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뒤란의 오래된 청매도 놓치지 않고 둘러서서

매화를 사랑했던 조선 선비들을 그리며

최초의 원예록쯤 되는 강희안의 <양화소록>도 들먹였네요.


한옥마을로 들어갑니다.

1911년 전주성이 철거되고

호남일대 쌀을 군산항으로, 일본으로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한 전군가도를 만든 일제에

민족자본가와 중소 상인들이 저항의 의지로 이 터에 하나둘 모여 기와지붕을 얹었다지요.

남문 북쪽 서쪽의 일본 상권과 마주보이는 곳에

마치 대치하듯 그리 한옥마을이 시작되었다 합니다,

경기전과 향교를 안고 있는 여기에.


잠시 쉬고 움직이도록 일정을 짰더랬습니다.

숙소에서 운영하는 찻집에서 더디게 온 이들도 모두 모였지요.

금룡샘과 유설샘과 미루샘과 휘령샘과 연규샘과 윤지샘과 소울이와 소윤, 그리고 옥영경.

희중샘은 밤에.

지난 4월 빈들에 왔던 여섯 살 소울이와 세 살 소윤이 또 훌쩍 커서 왔습니다.

숨을 돌렸으니 다시 걸어볼까요?


오목대로 향하기 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들립니다,

어쩌면 전주행의 핵심일지도 모를.

오목대를 조선의 시작과 끝이라 표현한다면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 대한 의지를 새긴 비석에 고종이 친필로 태조고황 제주필유지를 새겼다 하니)

한편 이곳에서 사람이 하늘이라는 만민평등을 들고 나왔던 동학은

얼마나 커다란 혁명의 역사일 것인지요, 그 시대에 말입니다.

‘조선역사와 동학농민혁명’,

이번 빈들의 제목이 이쯤이지 않을지.

소설가 김성동 선생의 얼마 전의 인터뷰에 의하면

당신 젊을 적만 해도 동학을 겪고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는데

어느 역사가도 그들을 찾아오지 않았다지요.

반민특위의 꺾인 허리처럼 동학도 그렇게 밟히고 말았던.


오목대에 오릅니다.

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가을 저녁답을 사진에 담기도.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오며

본향인 예서 잔치를 했던 곳.(길 건너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

한나라 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태평가를 예서 읊었다는 비석이 있습니다.

그 비석에 고종의 친필을 새겼던 것.

전주, 여기 조선의 시작이 있었고 그 끝이 있었노니.

그리고 그 왕조를 흔든 동학이 있었겠노니.


저무는 오목대를 내려와 서둘러 삼천동으로.

유명한 막걸리 골목에서 이름 높은 용진집 밥상.

전라도식 푸짐한 밥상에서 고향에 돌아온 객지 자식들처럼 한껏 먹고

전일슈퍼(가맥)로 넘어갑니다.

택시 두 대로 움직였지요.

가게 맥주, 가게에서 파는 가격에 안주를 즐기는 전주 특유의 술문화.

“줄 서 있는 동안 배 꺼지겠다.”

연탄불에 구운 황태를 찢어 청양고추 통깨 듬뿍 섞인 장에 찍어먹노라니

언제 저녁을 그리 배부르게 먹었더냐 또 잔뜩 먹은.


숙소로 돌아와 차를 냅니다.

방 두 개와 마루와 거실이 있는 옛집입니다.

준비된 차가 많아 청차를 차례로 내지요.

민북청차의 대표 대홍포가 다 있습디다.

맘껏 마시라 주인장이 내준 차들이었지요.

둥글게 앉아 동학농민혁명전쟁 훑기,

금룡샘이 당시 노래도 들려주고,

돌아가며 시도 읽고.

신동엽의 금강 서두며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며.

빈들모임 앞두고 근자에 금룡샘과는 여러 차례 동학 이야기 오갔더랍니다,

전진우의 <동백>이며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유적 답사안내서 <전주성을 점령하라>,

그리고 신용하 선생의 논문이며. 

가슴 일렁인 시간들이었지요. 


새벽 3시도 훌쩍 넘기며 곡차도 한 잔.

아름다운 젊음들.

(아침에 나가보니 늘 물꼬에서 끊임없이 들먹이는 대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꿈하게 해놓은 샘들!)

자주 웃어제끼는 소리에 소연이가 깨서 어미를 힘들게 하기도.

그러다 또 어느새 자지러지게 웃고 소연이 뒤척이고.

가족들이 모인 것 같다던 밤이었습니다.

오래 만났고,

물꼬의 인연들이 또한 그리 가까운 거리들이고.

아이들이 고생한 밤조차 온 식구들 모인 명절 같은 풍경.


자, 그리고 우리들의 내일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3856 2014.12. 2.불날. 맑음 옥영경 2014-12-15 834
3855 2014.12. 1.달날. 눈보라 / 김장 옥영경 2014-12-13 836
3854 [11.1~30] '물꼬에선 요새', 쉽니다 옥영경 2014-11-21 750
3853 2014.10.31.쇠날. 젖은 아침 옥영경 2014-11-01 690
3852 2014.10.30.나무날. 맑음 옥영경 2014-11-01 716
3851 2014.10.29.물날. 맑음 옥영경 2014-11-01 662
3850 2014.10.28.불날. 맑음 옥영경 2014-11-01 653
3849 2014.10.27.달날. 높고 파란 하늘 옥영경 2014-11-01 670
3848 10월 빈들(2014.10.25.~26) 갈무리글 옥영경 2014-10-31 816
3847 10월 빈들 닫는 날, 2014.10.26.해날. 파아란 하늘! 옥영경 2014-10-31 697
» 10월 빈들 여는 날, 2014.10.25.흙날. 가을하늘! 옥영경 2014-10-31 992
3845 2014.10.24.쇠날. 하늘 좀 봐요, 가을하늘 옥영경 2014-10-31 659
3844 2014.10.22.~23.물~나무날. 비 내리다 갬 옥영경 2014-10-31 657
3843 2014.10.20~21.달~불날. 비 내린 종일, 이튿날 쉬고 내리고 옥영경 2014-10-31 656
3842 2014.10.19.해날. 맑음 옥영경 2014-10-31 853
3841 2014.10.18.흙날. 흐림 옥영경 2014-10-31 658
3840 2014.10.16.~17.나무~쇠날. 썩 내키지 않는 걸음처럼 맑다고 하기는 그런 옥영경 2014-10-31 675
3839 2014.10.15.물날. 맑음 옥영경 2014-10-31 705
3838 2014.10.13.~14.달~불날. 맑음 옥영경 2014-10-31 683
3837 2014.10.12.해날. 맑음 옥영경 2014-10-31 645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