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 2.불날. 맑음

조회 수 834 추천 수 0 2014.12.15 09:06:02


밤, 가마솥방 반자를 닦았습니다.

반자,

지붕 밑이나 위층 바닥 밑을 편평하게 하여 치장한 각 방 천장의 겉면을 그리 부르지요.

지난 어느 때였던가, 한 날 가마솥방으로 아침에 들어서자

천지사방 폭발물의 잔해가 널려있었습니다.

양념으로 쓰려 덜어서 플라스틱병에 넣어둔 포도효소 하나가

미처 발효를 끝내지 못했던가 봅니다.

안에서 용을 쓰다 결국은 뚜껑을 밀고 분노처럼 터졌던 것.

바닥과 벽에 닿은 것들은 진즉에 닦아냈으나

천장에 있는 것들은 곰팡이처럼 얼룩처럼

어쩌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을 불러 세우고 있었지요.

오늘도 저녁밥을 먹다 고개를 젖혔을 적

어느 날 불현듯 창 너머에서 들이닥친 풍경처럼 넘실넘실.

그예 하고 말자,

A자 사다리를 들여와 그렇게 다 저녁에야 일을 시작했더랍니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축여주고

세제를 푼 물에 수세미를 적셔 밀고

다시 걸레를 가지고 여러 차례 닦았습니다.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하지만 자꾸자꾸 범위는 넓어갑니다.

한번 내려갔다가 올라오기가 힘이 드니 사다리에 올라선 김에 팔을 최대한 뻗지요.

감나무에 오르는 이들이 그랬으리라,

저거만 저거만, 좀 더, 좀 더, 한번 오른 김에 또는 팔을 뻗은 김에 하나 더 따서 담으리라,

그러다 그만 가는 나무가 뚜욱,

그렇게 해마다 여러 명이 나무에서 떨어지고는 하는 감고을입니다, 여기 영동.

그 마음이 이랬으리라, 그 순간이 이랬으리라.

어느 순간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요.

마치 허공이 단단한 땅이기라도 하는 양 그 곳으로 발을 디디려 합니다.

감은 꼭 저 가지 끝에서부터 익었고

그거 하나를 기어코 따려고 기어가다 툭 나무가 부러져

아래 커다란 바위로 떨어지며 얼굴에 그림처럼 긁힌 자국을 단 적이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 그 소리에 놀라 달려오셔서 다시 집으로 좇아가 아까징끼 빨간약을 들고 와

온 얼굴에 바르고 애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셨더랬지요.

다행이다 다행이다 머리를 그대로 바위에 떨어졌으면 어쨌을 거냐,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얼굴 패이지 않고 긁히기만 해서 다행이다,

40여년이 지나서도 햇볕 아래 서면 얼굴에는 기미처럼 그늘이 져있는 흉터.

아이고, 온 허리가 다 아파옵니다.

아래에서 소사아저씨가 필요한 것들을 올려주어 그나마 오르내리는 일을 좀 덜지요.

가끔 혼자 높은 곳의 일을 홀로 하며 소사아저씨 얼마나 힘이 드실까,

스미는 짠한 마음도 밀기도 했더랍니다.

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인지.

10학년 나이가 되면서 제도학교로 가기 전

아이 어릴 때도 그렇게 그 아이 손을 빌려 이렇게 일을 했습니다.

이런 순간도 연대를 생각하지요.

이러다 온 천장을 다 닦겠네,

폭발물의 흔적이 아니어도 어느새 앉은 먼지며 파리가 다녀간 흔적이며...

아, 이제 그만,

더는 팔이 아려, 어깨가 아파, 또 사다리 위에 버티고 선 다리가 저려

그래 그래 못 본 척 하기로 하지요.

그래도, 속이 다 시원합니다, 저 잘생긴 우리 아이들 얼굴 같은 반자!


아침에는 물통의 물을 갈았습니다.

부엌에는 커다란 물통 하나 있지요, 180리터짜리.

거기 물을 채워둡니다.

아이들이 드나드는 곳, 혹여 물 때문에 곤란을 겪을까, 몇 번의 그런 경험들이 있기도 했고,

이제는 수도 사정이 훨씬 나아졌는데도

그래도 근정전이며의 드므처럼 그리 물을 담아두는 곳.

그러나 쓰기보다 시간이 지나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이 되고

그러면 물도 썩기 마련, 갇힌 것들은 늘 그러하리니.

비워내고 씻고 말리고 다시 채웠습니다.

쓰이는 단 한순간을 위해서, 쓰이지 못하고 그리 버려질 수 있을지라도

그게 아이들을 맞는 마음이려니.

계절과 계절 사이,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하는 물갈이.


아이가 며칠 기숙사를 나와 집에서 학교를 갑니다.

새벽에 나가는 차를 타고 가야 하지요.

어제 몰아친 눈은 이 새벽 단단합니다.

큰 도로까지 2킬로미터를 나가야 버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북으로 난 이 골짝을 걸어 나가는 일이 만만찮을 테지요.

차로 태워주리라 나서는데, “길 미끄러우니 걸어 나갈게요.” 합니다.

그렇게 아이는 학교를 갔습니다.

고맙고 든든합니다.

그래도 빈속에 보내기는 추운 날이 더 추울까 하여, 기숙사에 가 아침밥을 먹는다는데도

후렌치토스트와 차를 멕여 보냈습니다.


온갖 커다란 용기들이 다 나와 있는 어제 한 김장 뒷정리를 했고,

부엌 곳간에 발(screen)을 이제야 떼어내고 겨울 커튼을 달고,

11월 한 달 물꼬에 부재하는 동안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줄을 서서,

급기야 네팔까지 전화가 오기도 했던,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사는 일은 여러 어르신들이 편의를 봐주고는 한 덕에

담당자들이 다 해놓고 마지막 사인만 기다리는 서류들을 위하여

우체국이며 농협이며 면사무소며 그리 도장을 찍으러도 다녀왔습니다.


섣달, 기다리는 10학년 한 달 상담이 있을 터이고

청소년계자를 할 테고

겨울 계자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례모임과 수행모임은 계속되겠지요.

무엇보다 겨울 나날을 살아내는 일이 제일 큰일(중요하다는 의미루다)일 것.

12월입니다, 김장도 했고, 연탄도 들어왔고, 장작(이게 말입니다, 한자이더군요, 長斫, 길 장에 벨 작)을 팼고...

산골 겨울을 또 가슴 뜨겁게 살아낼 것입니다, 오시는 그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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