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 3.물날. 대설주의보

조회 수 795 추천 수 0 2014.12.18 07:30:54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에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회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이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이용악의 ‘그리움’ 전문)



간밤 밤새 눈 내리고, 멈췄다 다시 눈 풀풀거리는 오후.

가마솥방 붙박이 선풍기 둘을 이제야 내리고 털고 풀고 씻고 말리고 쌌습니다.

된장집으로 가 소사아저씨의 물건들이며 신발장이며 죄 뒤집어 먼지도 털었지요,

네팔에서 돌아오며 쓸고 닦고도 하였지만.

달골을 내려와 겨울을 나고 가는 학교 사택,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또 하는 거지요.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는 간장집을 쓰지 않은지도 몇 해 되나봅니다.

아주 된장집 방 한 칸을 얻어 겨울을 나기 시작한 게 말이지요.

머무는 이들은 고추장집에 들고.

오래된 여덟 평짜리 사택엔 방이 둘, 작은 마루가 하나, 그리고 부엌이 딸려있는 구조.

학교 큰마당 건너 간장집 된장집 고추장집, 그렇게 낡은 세 채의 사택이 있지요,

1970년대 지어진 블록 건물.

아직 물꼬는 바람 숭숭한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있답니다.


눈으로 길이 막혔습니다.

산마을의 겨울이면 흔한 일이지요.

그런데, 아주 겨울 한가운데라면 슬금거리며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지만

눈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이렇게 짙으면 길이 쉽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 기숙사에서 나와 집에서 읍내 학교를 가는 류옥하다는

새벽 눈 내리는 마을을 뛰어나갔습니다.

밥은 기숙사에서 먹겠다고 상차리기를 말려 따뜻한 차만 쥐어 보냈지요.

결국 눈에 발이 묶여 오늘은 학교 기숙사에서 자기로 했다는 연락.

(아, 류옥하다는 그 나이(10학년)에 이르러 제도학교를 가길 잘했다 합니다.

뭔가 생각할 수 있는 나이에 갈 수 있어서,

그래서 자유의지로 많은 걸 결정할 수 있다며.

행복한 청소년기인 듯 보여 적이 마음이 놓이더이다.

아이들이 9학년까지 집에서 보내고

그렇게 고교생으로 제도학교를 가는 것도 좋은 길 하나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눈에 갇히기로야 여기가 더해

이 달에 물날마다 하기로 한 10학년 상담 하나도 결국 밀렸습니다.


네팔을 떠나기 전 예비 상담을 하고 갔더랬지요.

수행모임과 다례모임도 결국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보내야 할 원고 한 편 여유롭게 써서 마감시킬 수 있었군요.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는 여행자거리가 있습니다, 타멜이라는.

그곳 서점에서 <The Ascent of Rum Doodle>(W.E. Bowman, 1956)를 사왔지요.

오래전 읽었고, 그 명성은 더 오래 전에 들었으며,

이번 네팔행에 동행했던 책입니다.

우선 엄숙함에 대한 비웃음 같아서 슬쩍 같이 파도를 탔었군요.

산악소설들은 대개 너무 진지하니까요.

영어에 대한 질감이 더 있다면 한참 더 재밌게 읽지 싶은 글.

지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요기스탄이라는 나라에 우뚝 솟은 눈 덮인 성채 해발 12,000.15미터에 오르는

한 무리의 사랑스러운 무능력자들의 이야기.

빌 브라이슨의 손에 발견돼

(<거의 모든 것들의 역사> <나를 부르는 숲> <세익스피어 순례>,

<더 타임스>와 <인디펜던트>에서 여행 작가 겸 기자.

<더 타임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라던 그),

몇 해 뒤인 1997년 런던 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거론했고,

작가 부인인 에바 보우먼의 편지를 받게 되면서

책에 얽힌 이야기들이 비로소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모델이 윌리엄 틸먼의 난다 데비 등반대에 관한 1937년의 기사였다거나

럼두들에 나오는 153이란 숫자는 어린 시절 그의 집 주소였다거나 하는.

1959년 오스트레일리아 남극원정대 대원들이

그 책에 대한 애정에서 남극 몇몇 지형에 이름을 붙이고,

1966년 이래 ‘마운틴 럼두들’은 공식지명이 되기에 이릅니다.

지명뿐만 아니라 침낭, 산악단체, 말, 심지어 록밴드 이름으로도 애용되고,

‘그레이트 럼두들 퍼즐’ 게임도 나오고,

1980년에 하멜에 250개 좌석을 갖춘 럼두들 식당까지 문을 열지요,

에베레스트 등정대의 집결장소이자,

산악인들이 8000미터급 산을 올랐다 돌아오며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장소로 유명한.

벽면에는 에드먼드 힐러리, 라인홀트 매스너, 로브 홀,

그리고 수많은 세르파의 친필 사인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예, 거기 다녀왔습니다!)

책은 2001년 빌 브라이슨의 서문으로 다시 인쇄되며

산악인들에게는 이미 고전이었던, 혹은 모험가들끼리의 암호명 같은 럼두들 등반기는

그렇게 대중서적이 되지요.

모든 것을 선의로 읽는 대장 바인더, 거구에 무뚝뚝하고 퉁명스런 보급담당 벌리,

엉뚱한 소망을 잘 품는 과학자 위시, 촬영 셧, 외교관이자 언어학자 콘스턴트,

길잡이지만 노상 길을 잃고 헤매는 통신담당 길 안내자 정글,

툭하면 병에 걸리는 주치의이자 산소 전문가 프로운.

좀 억지스러운 느낌으로 읽다가(‘One ot the funniest books for years'에 너무 갇혔던),

정글이 워키토키를 준비하고 대원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조금씩 낄낄거려지더니,

콘스턴트와 물개 트래버스의 합창에서 코가 찡해지기도.

제1캠프를 오르며 이렇게 높은 산을 오른 체험을 기록한 책에서 읽은 대로

바인더는 한 계단 오른 뒤 10분을 기다리고 다시 한 계단을 오르는데, 콘스턴트 왈,

“산소공급장치를 사용하고 있을 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

그제야 바인더는 말하지요.

‘내 인상을 구길 가능성이 있는 이런 일화를 여기서 내가 굳이 언급하는 것은 책에서 얻은 지식이 우리를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명한 예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일화는 내가 독자의 입장일 때는 어떤 것도 신뢰해서는 안 되며, 저자의 입장일 때는 독자들을 오도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을 안겨줬다.’

또, 위시의 몽상에 대한 맞장구로 얘기한 바인더의 몽상적 경험은 내 이야기이기도.

누구라도 어릴 적 한번쯤 했었을.

‘자전거로 그레이트노스로드를 따라 반쯤 달려갔을 때 나는 문득 스코틀랜드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나를 속이기 위해 날조된 지명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읽은 모든 책, 검소하고 알뜰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랍비 번스(스코틀랜드 민족시인), 로몬드 호수와 보니 찰리에 관한 노래들, 이 모든 것은 그 음모의 일부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척하는 북쪽 사람들은 모두가 그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이었다.’

피곤해죽겠다고 불평하던 정글이

여러 개의 나침반에서 알코올을 뽑아 마시고는 몸이 북쪽으로 향하는 버릇이 생겨

동쪽이나 서쪽으로 갈 때는 옆걸음을 치고, 남쪽을 갈 때는 뒤로 자빠지고...

익살맞고, 그런 만큼 소소하게 재밌습니다.

우리들에게 농담이 필요한 것처럼 가끔 이런 능청스러운 책이 필요하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3876 2014.12.22.달날. 아침 눈발 선 하늘 옥영경 2015-01-03 816
3875 2014.12.21.해날. 맑으나 가끔 눈 날리고 옥영경 2015-01-03 648
3874 2014.12.20.흙날. 맑음 옥영경 2014-12-31 639
3873 2014.12.19.쇠날. 밤 눈 옥영경 2014-12-31 783
3872 2014.12.18.나무날. 맑음 옥영경 2014-12-31 653
3871 2014.12.17.물날. 오후 눈 옥영경 2014-12-31 655
3870 2014.12.16.불날. 오후 눈 날리다 옥영경 2014-12-31 755
3869 2014.12.15.달날. 뿌연하늘, 그래도 푹한 날, 밤 눈 옥영경 2014-12-31 854
3868 2014.12.14.해날. 흐림 옥영경 2014-12-29 725
3867 2014.12.13.흙날. 밤새 눈 내리고 멈춘 아침 옥영경 2014-12-29 770
3866 2014.12.12.쇠날. 맑다가 저녁부터 눈 옥영경 2014-12-27 786
3865 2014.12.11.나무날. 흐림 옥영경 2014-12-27 668
3864 2014.12.10.물날. 가벼운 비 지나는 옥영경 2014-12-27 737
3863 2014.12. 9.불날. 맑음 옥영경 2014-12-27 999
3862 2014.12. 8.달날. 아침 눈 옥영경 2014-12-26 741
3861 2014.12. 7.해날. 흐림 옥영경 2014-12-26 734
3860 2014.12. 6.흙날. 눈 옥영경 2014-12-25 739
3859 2014.12. 5.쇠날. 구름 옥영경 2014-12-25 782
3858 2014.12. 4.나무날. 다시 눈발 옥영경 2014-12-18 649
» 2014.12. 3.물날. 대설주의보 옥영경 2014-12-18 795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