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물날 맑음, 101 계자 셋째 날

조회 수 1448 추천 수 0 2005.01.28 19:35:00

1월 26일 물날 맑음, 101 계자 셋째 날

새벽에야 눈이 멎었습니다.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운동장을 가로지릅니다.
천지, 천지가 눈입니다.
아이들을 불러 창문을 열어 봬줍니다.
"아..."
'환한 맞이'를 상징하던 살구나무 노란색 리본은 선명도 해서
그찮아도 상큼한 아침 기분을 퍽이나 올려줍니다.
"아침을 드시고 경로당 앞으로..."
아니나 다를까 마을 이장님 안내방송이 흐릅니다.
눈 치우러 나가자는 게지요.
모두 가마솥방으로 달려갈 무렵,
아이들을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는 승현샘한테 뭔가라도 해얄 것 같아
전신 안마를 해주던 참에
우리의 일다 선수, 붙여놓은 속틀을 자꾸 들여다보며 묻습디다.
"선생님, 지금 주물럭 시간이예요?"
오늘 오후 '주물럭'이라고 적혀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형아는 밥 먹으러 안가요?"
"샘인데, 승현샘."
"샘이예요?"
내참, 어제도 하루 죙일, 방금까지도 어깨에 매달려 다니더니만...
아이들 눈이란 게 그렇습니다.
저야 그들에게 늘 열아홉이지요, 하하.

"아침 때건지기 언제 해요?"
너무 배가 고파서 쓰러진 창욱이도
(할머니 할아버지랑 사는 그인지라 늘 아침이 이를지도 모르겠네요)
아침 든든히 먹고 4모둠에게 설거지를 맡기고는
너까래며 쓰레받기 삽 합판들을 메고 나섰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벌써 저만치 길을 열고 계십니다.
길을 치우는 아이들 사이로
원성을 들어가면서도 눈이 주는 흥겨움을 주체할 길 없어
눈싸움 하는 치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학교에서 2킬로미터 흘목까지 길이 뚫리고서야
얼굴 달아져들 올라왔더이다.
경표랑 현수 효빈이가 누구보다 땀을 많이 흘렸대지요.
학교에 남았던 몇 어른과 몇 아이들은
학교 안을 정리도 하고
된장집 고추장집과 간장집(사택들), 대문 들과 본관 사이로 길을 내고
큰 화장실과 강당으로도 길을 만들었습니다.

날이 너무 푹해서
앞산 나뭇가지들에 걸렸던 눈들이 턱턱 내려앉아
온통 하얀색이던 풍경에 구멍들이 나데요.
"눈 다 녹겠다."
눈썰매를 타러 가자 재촉을 해보지만
눈 치우느라 힘이 죄 빠진 남자샘들도 좀체 움직이려들지 않고
아이들 속에서도 와아 하는 분위기까지는 일지 않습니다.
이미 지겨우리만치 눈 속에 있었으니...
엊저녁 어둠이 이미 내린 운동장,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의지해서까지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을 던졌던 그들이니까요.
학교에 남은 아이들이 저마다 아랫목을 차지하고 노닥거리거나
샤워로 밀린 땟구정물을 날려도 보내는 사이,
스물 댓의 아이들과 어른 넷만이 물꼬 새 눈썰매장으로 향했습니다.
손마다 들린 비료포대엔 지푸라기 한 단이 들어있었지요.
백년은 됐음직한 감나무를 끼고 돌아
넓은 수로가 있는 농로에 이릅니다.
초급 중고급 코스를 확인하고
위험한 건 혹 없을까 잘 살핍니다.
눈 속에 묻혀있던 초코파이 큰 봉지도 그래서 발견한 게지요
(파란나라지요, 여기. 환상이 있고 또 그것을 믿는 아이들이 사는).
그걸 캐내 눈 치우느라 빠진 뱃심을 넣은 뒤
엎드려도 타고 삼층 석탑형으로도 타고 샌드위치형으로도,
물론 홀로도 탔지요.
스키, 저리 가랍니다.
"아주 재밌어요."
줄 서있던 준영이 그저 신이 나서 떠들다
저를 보며 그 즐거움을 확인하려 듭니다.
"니네 학교가 더 재밌대메?"
"아니예요, 여기가 훨 재밌어요."
그때 바로 뒤에 서 있던 원석,
"다른 학교 다 필요 없어."
웃지도 못했습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단호함을 더 얹어 하는 그 말투라니...
아이들이 혹 내려오다 언덕 아래로 구르기라도 할까
수로 바깥에 섰는데
준영이, 몇 바퀴를 오르내린 뒤 다가옵니다.
"자유학교가 젤로 재밌어요."
그 왜, 확인사살 뭐 그런 것 있잖아요.
산이 흔들릴 만큼 웃었다니까요.
아이들은 고급코스에서도 이력이 붙자
중고급에서 내려왔던 그 힘으로
살짝 둔턱을 넘어 초급코스까지 내리 미끄러져갑니다.
아, 저 나무, 저 바위, 저 시내,
다 알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났는지.
우리들에게 삶이 온통 살아야할 즐거운 날이 돼버렸던 겝니다.

모두가 같이 하려던 '주물럭'이 눈 때문에 밀려
열린교실의 귀퉁이 방으로 밀렸습니다.
원석 정원 희선 혜린 경표 현철이가
밀가루죽 종이죽으로 상자 안에
행성 운석 달 토끼 우주선 우주인 비행접시 블랙홀 우주 정거장
천사 블랙홀 지킴이들로 채웠습니다.

한땀두땀에선 주머니, 지갑, 쿠션 가운데
저 하고픈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영운인 예 와서 배운 걸
집에서 익혀 견본을 만들어오기까지 했더이다.
해인인 쿠션 한 귀퉁이 바느질이 달라 아주 잠깐 소침하더니
이내 자기 규모에 고맙고 기뻐합니다.
아진이는 바느질을 잘하는 엄마 손을 자주 본 모양입디다.
류옥하다는 남경샘 선물 주머니를 만들고
의로는 지갑에 심혈을 기울였지요.
차영이도 소진이도 소하도 곰돌이 꽃무늬 별무늬 천에다
바느질을 뜨거이 하고 있었지요.
제 의욕을 바느질 솜씨가 따르지 못하자 울음으로 시간을 다 채운 지혜도
우는 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고 넘들 마치고서야
쉬는 시간 짬짬이 바쁘더니 쿠션 하나를 만들었더이다.
"내가 봐도 뿌듯한데 저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숙희샘은 그들의 성과물에 마냥 흐뭇해라 하시데요.

'겨울산 겨울들'방도 있었네요.
현수 태준 재홍 찬욱 동희 일다는
감자도 살째기 구워먹고
겨울 산에서 겨울 들, 그들이 가진 세상을 만났다지요.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는 한 어른을 좇아 시도도 해보다
터덜터덜 내려왔데요.

열린교실 어느 방도 마음에 들잖았던 '다싫다'는
산토끼 잡으러 계곡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는데
힘들어한다 싶을 즈음 마침 얼음이 깨지면서
재미를 몰고 왔다합니다(자연이 준 선물 보따리 또 하나 풀다).
산 중턱에서 토끼 발자국을 찾아 따라가니
저수지로 이어져 있더라던데
얼음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게서 다해보았다지요.
거기다 한데모임에서 할 말하기 연습까지 살뜰히 준비해서
토끼 발자국은 여우 멧돼지 발자국까지 둔갑을 해
아이들 배를 살살 아프게 했더랍니다.
경태 명우 현재 재준이 그들이었지요.

물꼬의 뜨개질열풍이 식을 줄 모르는 이 겨울입니다.
아홉이나 우르르 들어왔대요.
민재는 자꾸 뜨고 또 뜨고 싶어 하고
아리는 손목아대를 먼저 만들어 부러움을 사고
목적에 맞지 않은 실로 고생하던 효빈은
적절한 실을 찾아 손가방을 뜹니다.
흠 없이 만들고픈 창준이가 끝없이 풀고 매는 동안
한결이는 동전지갑을 만들었습니다.
찬슬과 청민이는 무리에서 좀 떨어져 앉아
오누이가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지요.
용균이는 시간이 다 가도록 완성이야 못했지만 곧잘 코를 뜨고 있고
은비의 아대는 모양새가 꽤나 곱습디다.

한자놀이에는 준영 준희가 들어갔네요.
"완전히 가정교사네."
모두들 그랬습니다.
온 몸으로 정화샘은 준희랑 한자로 놀고
준영인 그저 딴 소리만 하고 앉았는데
끝날 무렵 배운 걸 정리할 때 보니
그도 죄다 알고 있더라나요.
그러니 애들에게 자꾸 꼭 봐라 봐라고 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가자미 복장어 눈을 가졌는 걸요.

성빈이랑 현빈이를 찾았더니
책방에서 소파랑 놀고 있데요.
뭐 꼭 교실을 들어가야는 건 아니니까.
영어놀이방은 찾을 수가 없더니,
폐강됐던 걸요.
고교 영어교과 남경샘은 밤새 놀이 상자를 만들었더랬는데...
"아유, 여기까지 와서 공부해야 돼?"
누가 그랬다나요.
열린교실에서 힘차게 애들 몰고 다니는 승현샘과 기표형아네,
모두 하나가 된 그 느낌은 숙희샘뿐 아니라
보는 우리들 모두를 즐겁게 했더랍니다.

오빠는 동생이 갖고픈 꽃신을 위해
연탄도 나르고 물지게도 지고 외양간도 치우고...
애니메이션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한데모임을 하기 전 손말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짧은 비디오도 본 게지요.
류옥하다와 영운이의 뒤를 이어
오늘은 해인이와 성빈이가 진행을 맡았네요.

침묵 속에서 대동놀이를 다해봤지요.
기차를 탔습니다, 긴긴 기차요.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를 달리는 기차였지요.
짐 보따리와 안전까지 다른 이에게 맡기고 타야하는 기차.
그 말없는, 목소리까지 낮은 경태도 답답하니 어찌나 궁시렁대던지요.
"아, 어디지 어디지..."
"바로 해줘야지..."

오재미도 던졌습니다.
그거 "오, 재미!"의 준말 아닌가 몰라요.
이야, 기표형아 상수샘 이근샘,
이번에 오재미 싸움 있다는 소문 듣고 연습했나 보데요.
쪼끄만 창욱이도 우와, 잘 던지던 걸요.
일다는 어찌나 바지런히 던져대던지...
영운이와 기표형아, 승현샘은 사람 여럿 잡겠데요,
던지는 게 말입니다.
아이들이 오재미에 맞아 울타리로 나가자
그제야 아이들 무데기에 묻혔던 유정화샘이 드러났는데
숨었던 재능이 함께 모습을 나타내었지요.
오재미를 안아 죽어있던 아이들을 여럿 살렸더이다.

아이들방에 불이 꺼지고 샘들은 가마솥방에 앉았겠지요.
효립샘(나무샘)은 아침에 먼저 가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지요,
빈 자리가 유난히 커서 우울하게 만드는.
죙일 맘이 가라앉았던 이는 남경샘 뿐이 아니었지요.

남경샘이 어른 혹은 교사로서
자신의 반응을 어찌 조절해야하나 숙제가 되더라 하자,
모두 남의 얘기가 아니지 합니다.
우리 창준이 같이 어른의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한 아이가 아니더라도
"반응"은 분명 "재반응"이 따르는 거니까요.
자주 우는 지은이랑 지혜도 어른의 반응에 따라
울음이 다르더라구요.
어떤 샘 앞에선 이제 더는 울지 않는데
어떤 샘 앞에선 계속 울고 있는단 말예요.
바느질에서의 지혜 울음도 그랬어요.
어른을 내내 기다리며 운 셈이었지요.
첨에 상수샘이 다가가는 걸 다른 샘이 말렸더랍니다.
자신이 버려졌다 상처로까지 가는 걸 모른 체해선 안되겠으나,
그 정도는 자신이 극복해야할 문제로 결국 이해하고
울음을 접었거든요.

칭찬이 사람을 움직이는 긍정적 측면도
아이들 만나다 보면 으레 나오는 얘기입니다.
"물꼬는 칭찬에 인색합니다.
칭찬 때문이 아니라 그게 정의니까
그게 이 우주에서 내가 할 바니까
움직여야는 것 아니냐 생각하거든요."
칭찬이 혹여 목적이 되는 걸 경계하자는 게지요.
물론 여러 정황이란 게 있기 마련이고
칭찬은 훌륭한 벗이 되기도 하다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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