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수행 중.
그래도 일상은 계속된다, 삶을 잇는다.
토굴을 나오지 않겠다던 날들이 학교가 토굴이고 있다.
부슬거리던 비 그치고 잠시 해 난다 했더니
이튿날 또 흐렸다. 허나 푹한. 봄날 같은. 봄 머잖은.
소사아저씨는 쉬엄쉬엄 이제 봄이요,를 연발하며
학교 뒤란 너머에서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주워오고,
연탄재를 깨고, 꽃밭에서 마른 풀들을 걷어내고.
옷을 짓고 있었다, 조각천들로.
뒤판을 다 잇고, 다시 앞판 양쪽을 잇고,
그리고 솜과 안감을 대고 다시 조각 하나하나를 따라 손바느질을 했다. 오늘, 다 했다.
이제 전체를 잇고 마감하고 깃 달면 끝.
목이 뻐근하고 뒷골이 묵직해지더니 머리가 쑤시고
오른쪽 어깨가 아프고 손이 아프고 검지 손가락에 바늘귀 구멍이 몇 개 뚫리고,
그만 온몸이 다 욱신거린다.
바삐 하느라, 밤을 새고도 하느라 더했을 테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만드는 옷이겠다.
정성이라면 이런 것도 그것이겠다.
한 팔순 노모가 저승길에 입고 가실 옷이다.
머리는 계속 자유학기제 기획서에 있었다.
이달 말 마감이다.
토굴수행이 결국 기획서를 쓰는 시간으로만 대체되는 건 아닐려나.
투명사회 피로사회 단속사회 감시사회 잉여사회,
이런 담론들이 출판계의 한 유행.
거기 한 문화평론가가 덧붙였다, 억하심정의 사회라고.
이 사회가 구성원들을 화약고처럼 억하심정(抑何心情)케 하고,
그 압력은 일상의 시비를 통해 거칠게 타인을 향해 터뜨려진다,
특정 개인을 넘어 불특정 다수에 이르기까지,
눈앞의 가족부터 자신과는 연고도 없고 상관도 없는 이들에게까지.
억하심정(抑何心情) [명사] 도대체 무슨 심정이냐라는 뜻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 수 없거나 마음속 깊이 맺힌 마음을 이르는 말.
비슷한 말 : 억하심사ㆍ억하심장.
기쁜 일상을 만들어내는 일 말고 무엇이 그 마음들을 풀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