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더라, 참 좋더라, 이 빈들,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처럼, 얼굴을 스치는 봄바람처럼!


“야, 그때 그랬잖아.”

“아니야, 그때...”

지나가서 이미 불변의 형태로 남았을 기억이란 것도

사실은 기억 안에서 자리를 이동한단 걸 우리 다 안다.

그것에 대해 전범으로 읽을 만한 영화가 홍상수의 <오! 수정>이리라.

같은 시간을 같이 지났으나 남자와 여자의 기억은 달랐다.

기억은 그렇게 시간의 풍화작용에 떠밀려 휘기도 하고 꼬이기도 하며

최초에 인식했던 것이 고스란하지 않단 걸 보여준다.

누구는 그런 기억의 불공정을 보완하기 위해 홀로 가지 않고 꼭 둘이 여행을 간다더만.

우리는 의식 안팎에 자리 잡은 욕망에 따라서 인식의 대상을 고르고 기억할 것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그러므로 함께 같은 시간을, 같은 곳을 관통하고 돌아보는 건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같이 뭔가를 하는 사실 자체만도 의미가 깊음이야 물론.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변주되는가가 재밌다.

특히 그 시간을 기록하는 사람의 글은

그 기록자의 눈, 그러니까 그의 인식, 그러니까 그 자신의 기억일 것.

빈들이나 계자를 하고나면

분명 여럿이 했으되 그건 순전히 나 자신이 보낸 시간, 이라는 전제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아래 만큼은 공유되는 게 맞을 것. 맞을까? 맞겠지. 맞다.


p.274

우리가 함께 있을 때면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밀려온다. 우리 사랑의 명명백백함 앞에서 현실이 기를 못 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금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은 정정당당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우리에게 모든 자리를 내주었다. 나중에 설욕전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날을 에릭 오르세나의 소설에 머무네.)


계자는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들의 빈들도 그러하였노니.


해건지기.

전통수련으로 몸을 풀고 티베트대배 백배, 그리고 명상.

우리 무슨 인연 이리 깊어

봄이 오는 문턱의 산마을에서 이 생의 한 날 아침을 이리 수행하며 맞고 있는가.

사흘 동안의 모든 일정의 끝은 ‘나눔’;

당신은 이 시간동안 무엇을 생각했는가,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오늘부터 이 골짝 마을버스 시간이 바뀐다.

새벽버스가 조금 늦어졌고 저녁버스 또한 조금 여유로워졌네.

낮버스는 그대로여 끊어온 기차표는 유효.

희중샘이 영동역까지 사람들을 실어가기로 하니 걸음이 더 한갓졌다.


밥상을 물리고 바느질 갈무리.

설거지는 희중샘과 금룡샘이 맡었네.

그리고 쓰기-들어선 봄; 빈들 갈무리글.

부엌에선 도시락이 준비되었다.


숙제... 우리들이 빈들에 들고 오는, 요새 자기가 다루는 생각거리.

나는 사랑을 들고 갔으나

펑펑 쏟아지는 한밤의 눈에 취해 읽기를 놓쳤더랬다.(기록자가 이래서 좋은. 변명이 가능하고, 또 덧붙일 수도 있으니.)

나는 사랑을 자주 그리 놓쳐버린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아

그냥, 그래

그냥 살지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생략)


(중략)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 할 수 있을 때


그 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거야


: 황지우의 ‘늙어가는 아내에게’ 가운데서


그러니까 사랑은 입에 있는 게 아니며,

사랑한다는 말은 최선을 다해 같이 늙어간 이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

최선을 다해 ‘같이’ ‘늙어간’,

시간과 공간을 같이 쓴, 그것도 '애쓴' 이들이 나누는 말!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의리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다들 잘 가시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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