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6.쇠날. 맑은 경칩

조회 수 769 추천 수 0 2015.04.01 02:39:02

 

놀랄 驚(경), 벌레 蟄(칩).

놀랐느냐, 벌레여, 깼느냐, 벌레여.

겨우내 허해진 몸을 위해 개울에서 개구리알을 건져먹기도 했다지.

흙을 만지면 무탈하다고 담을 쌓거나 벽을 바르는 일도 이날 했다.

겨울동안 얼었던 것들이 따듯해지며 들썩여 주저앉기도 하는 봄이니

그리 단도리를 요하는 것일 터.

벽을 새로 칠하거나 도배를 하기도 좋을 날.

그리고 나는 이번 주 하기로 한 목공일을 끝내다.

거실 소파 앞 테이블과 작은 식탁과 의자들,

완성품으로 실어가려면 트럭이어야 할 것이니 해체해서 싣다.

칠은 물꼬에서 하기로.


“언제가 되면, 도대체 언제 국가는 그 최고의 임무가 그저 몇 백 만의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행복을 안겨 주는 것이라는 걸 인정할까? 그리고 언제, 국가는 평화를 향해 전혀 눈에 띄진 않지만 애쓰는 많은 발걸음들이야말로 개인에게도 여러 민족들에게도 전장에서의 대승리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가운데서)

순전히 이 야만의 시절 탓일 테다, 잉게 숄의 책을 들먹이게 된 것은.

정녕 언제가 되면

몇 백 만의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걸 국가는 알게 될 것인가.

1980년대, 그때가 언제인가, 독재의 서슬이 시퍼랬던, 널리 읽히던 책이다.

히틀러의 광기에 맞서 뮌헨지역 대학생 저항조직 ‘백장미단’을 만들어 나치 체제를 고발하다

사형에 처해진 동생들의 저항과 죽음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는,

의대생 한스 숄과 철학과 소피 숄의 누나이고 맏언니인 잉게 숄의 기록.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용감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무서워도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 누구는 말하더라.


역시 그 80년대 우리는 황지우를 통해

다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었더랬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1983) 가운데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 잉게 숄 著,박종서 譯,靑史,188면, 값 1,900원




“어머니 오셨어요?”

“오냐, 잘 지냈니?”

“네.”




(사이...... 말없음)




“얘야, 내일이면, 네가 그 자리에 없겠구나.”



조피 숄이 처형 직전에 면회시간에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 장면쯤이겠다.

나치 시대와 80년 광주의 날들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인용한 책에서 시의 부제가 말하는 188쪽은 없다. 백지.

대개, 아마도 독재사회에 대해 침묵하는 세태에 대한 풍자 아니겠냐 했다.

‘맑디맑은 추모’의 시라고도 했다.


영화도 나왔다;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마르크 로테문트 감독, 2006)

곧 단두대 처형을 당할 여대생 소피 숄을 아버지 어머니가 마지막 면회를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이런 일이 다시 생겨도 나는 같은 일을 할 것이다,

소피가 말한다.

아버지, “옳은 일을 했다. 너희가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딸의 볼을 어루만진다.

“엄마, 엄마가 계셔서 힘이 됐어요.”

“집에 다시는 오지 못하겠구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기는 하지만 가족들 그 누구도 통곡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당했다.


그리고 어떤 수기에서 <아무도->을 또 만난다.

10년 전 자신의 결혼식에서 보이지 않는 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친구 아내가 아이를 등에 업고서 초라한 차림으로 들어서며 편지를 내밀더란다.

하루를 벌어야만 하루를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장수라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이가 오늘 밤 분유를 굶어야 하기에 못 간다고,

‘어제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온종일 추위와 싸우며 번 돈 만삼천 원’을 동봉했더란다.

“하지만 슬프진 않다.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너와 함께 읽으며

 눈물 흘렸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기에 나는 슬프지 않았다.”


오늘 나도 슬프지 않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노니.

아직 나 젊으니.

아직 용기 남았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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