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비오는 것만 같이 꿉꿉한 날.
흐린 게 아니라 뿌연 하늘, 모래바람이다.
미세먼지란다.
그리고, 어제는 20도이더니 오늘은 22도까지 올랐다.
누군가 기형도의 '오래된 書籍'를 옮겨놓았는데,
제대로 옮기지 않아 시를 훼손하고 있었다.
책장에서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을 꺼내 24쪽을 펼쳤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 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의 시가, 아니, 모든 시들이
마침표와 쉼표가 제대로 옮겨지길 바라노니.
마침표와 쉼표와 띄어쓰기와 행갈이와 연갈이도 시란 걸 생각해주기를,
그런 민감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제발!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햇발’이라 부르던 후배가 있었다.
내 나이 스물셋의 봄, 그가 내게 이 시집을 사주었더라.
기억이 아니라 기록으로 알게 된.
책의 맨 뒷장에 그리 씌어 있었네.
아, 기록이여!
그이는 오랜 시간 시를 썼고 마흔 넘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우직하게 썼고, 등단을 했다.
“시집 몇 권 낼 만큼 쌓아놨겠다.”
“뭐... '쓰는' 게 중요하지.”
그가 말했다.
우리 곁에는 늘 스승이 넘치나, 발견하는 우리가 드무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