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19.나무날. 갬

조회 수 718 추천 수 0 2015.04.19 02:05:30


새벽 비.

동이 트자 비도 멎었다.

어제 오늘 바깥수업을 쉬게 되어 이른 아침 잠시 산사에 갔다.

완주 화암사의 새벽, 말이 필요 없는,

그리고, 완주 안심사의 아침이었네.

산신각에서 바라보는 먼 산이 참말 절경이다.

고추장을 담기 위해 찹쌀풀을 쑤려 불을 지핀 아궁이 앞에서

자주 시가 차오르지만 흩어지고 만다.


깨어나고 있는 대해리의 늦은 아침,

창대비처럼 내렸던 간밤의 비로 산마을이 온통 물소리로 출렁댔다.

자꾸 비인가 바람인가 내다보게 되는.

동쪽 개울에서도, 마을 앞 대해 계곡에서도 콸콸대는 물소리.

수선화 촉이 올랐더라.

비 오고 날이 팍 오른 기온.


차 안을 정리한다.

전시회 도록들이며 읽던 책이며,

그땐 필요했고, 어느 땐가 필요하리라 넣어둔 물건들이 하나둘 쌓이며

이제 그 아래 무엇이 있었던가를 잊고,

그것이 필요한 때는 정작 넣어두었던 걸 잊고 다시 꺼내와 쓰고 또 넣어두어

그렇게 우산도 넷이나 있었다.


교무실 큰 책상 하나, 자꾸 쌓이는 서류며 책이며 더는 자리가 없는 그곳,

일단 다 끌어내렸다.

그러지 않으면 정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듯하여.

어찌어찌 올리겠지,

일단 무언가를 하려면 그리 시작해야 한다.

물론 시간을 좀 들여야겠다 생각할 때.


오랫동안 하얀 셔츠 하나가 꺼내져있었다.

붉은 펜 얼룩 진 부분에 그림 하나 넣어야지, 그래놓고 몇 달이 흘렀다.

아주 잠깐 작은 꽃 몇 개 넣으면 될 것을,

아크릴물감이며 붓이며 물이며 접시며 그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날이 풀리니 일하기 좋고나.

매화 그림 하나 넣었네.

한참을 더 입을 수 있겠다.


아희야, 일단 움직이거라.

옴작거리다 보면 정리도 되고 그러며 또 힘이 생긴다.

저녁, 일제히 개구리들이 웅얼댔다.

‘일제히’ 일어서는 봄이다.


이제야 생각이, 아니 사실은 진즉에 그리 생각했고 그것을 굳힌.

2015학년도는 그저 흘러가기로 한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가지고.

2015학년도 계획을 짜던 3월 첫 달날에 그리 썼던 대로

3월 하고도 스무날이 흐르고서 생각은 그같이 굳혀졌다.

‘자유학기제 지원센터 일은 주로 가을학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고정적인 수업을 가거나 강연을 가거나 코디네이터로 갈 테지.

이야기가 오가는 인근 도시의 한 학교가 될 것이다.

뭔가 해야 할 것이란 스스로의 압박, 이제 그런 거 안 하기로 한다.

여태 그리 산 것으로 충분하다, 살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건.

조용히 살고 싶기도 하고 잊히기 싫다던 어느 유명한 가수의 넋두리처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백?, 마음이 일어설 때까지 그저 흘러가보기로 한다.

어쩌면 세월호를 타고 떠났던 마음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흘러가볼 것. 사람의 내일 일을 누가 알라고.

이런 식이 될 것 같다.

아직 한 주를, 좀 더 시간이 필요하면 한 달을 고민하고.’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은 그 방향으로 아주 갔다.

비로소 2015학년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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