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22.해날. 뿌연 하늘

조회 수 721 추천 수 0 2015.04.23 16:15:12


밥상에 봄꽃처럼 냉이가 올랐다. 이 봄에 처음 놓인 것이었다.


봄이다. 볕이 좋았다. 일하기도 좋고 책읽기도 좋았다.

일과 일 사이, 읽었던 책이라고 다른 책에 밀리고 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펼쳤다.


p.79

진화의 비밀은 죽음과 시간에 있다. 환경에 불완전하게 적응한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과 우연히 적응하게 된 조그마한 돌연변이를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 말이다. 유리한 돌연변이 형태들이 서서히 축적되기 위한 긴 시간이 바로 진화의 비밀이다. 다윈과 윌리스에게 퍼부어졌던 그 엄청난 반대의 목소리도 적어도 일정 부분은, 억겁의 영원은 고사하고 수천 년조차 상상하기 힘들어 하는 인간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지 70년밖에 살지 못하는 생물에게 7000만 년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그것은 100만분의 1에 불과한 찰나일 뿐이다. 하루 종일 날갯짓을 하다 가는 나비가 하루를 영원으로 알듯이, 우리 인간도 그런 식으로 살다 가는 것이다.


때로 우주에 대한 생각은 자잘한 사람의 일들에서 대범함을 불러주고는 한다.

고맙다. 마음 좋다. 부담스런 문건 하나를 이 밤에는 해치울 수 있겠다.

이 봄은 어떤 날들이신가,

책을 보내왔던 후배에게 인사 넣었다.


아침 달골, 지하수 건으로 이제야 사람이 왔다.

여러 해째 봄이면 넣었던 전화인데,

그러다 금세 여름 오고 가을 가고,

겨울이면 오르는 게 쉽잖은 곳이라 또 봄으로 밀리던 일이었다.

비가 많을 때 나오는 물이 탁하기 잦다.

아무래도 비가 올 때 상황을 봐야겠단다.

“제가 직접 못 와도 저희 직원 보낼 테니까...”

그런데 무너져 내린 뒤란 절개지를 더 걱정하신다.

“교장 선생님, 지하수는 제가 이제 아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틀림없이 해결해드릴 테니까,

그나저나 저거 어찌 하셔야겠어요.”

믿을만한 사람들을 보내주겠단다.

그리고, 혼자 풀려고 하지 말고 지역 어르신들한테 도움을 청하란다.

마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다.

도움은 도움대로 구하고, 우린 우리대로 견적서를 받아보기로.

올라간 걸음에 달골 화분들을 다 밖으로 내고 물을 흠뻑 준다.

아직도 이른 건 아닐까,

4월까지는 안심이 안 되는, 겨울을 보내주기 어려운 산골짝.


사택이며 교사(校舍)도 봄바람 넣는다.

기숙사에 가 있는 아이도 들어와 제 겨울을 정리한다.

물꼬는 너르나 식구들에게 이적지 딱히 정해진 거처가 있는 게 아니다,

언제고 사람들이 들어오면 방을 내주고 있으니.

하여 개인 짐도 이곳저곳 널려있기 쉽다.

더구나 아이는 물꼬를 한 꼭지점으로 9학년까지 이 산마을에서 홈스쿨링을 해왔더랬다.

오늘은 간장집이고 교무실이고 옷방이고 달골이고

두루 널린 자신의 살림들을 한 곳으로 정리를 좀 하고 있다.

언제든 공간을 떠날 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노니,

우리가 집을 나설 때마다 해왔던 말이다.

아이랑 오랜 여행을 했던 경험도 컸으리라.

이제 주 생활 무대가 제도학교인 아이라

이참에 물꼬에서의 제 삶의 공간들을 개고 있었다.

그러다 나온 상자 하나, 거기 어미의 새 옷이 있었네.

곱다. 산마을에서 입어낼 수 있는 옷이 아니었던 게지,

십년도 더 넘어된 것일 듯,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가물거리기만 할 뿐.

우리가 살아왔던 날들이 곳곳에 그리 자리 틀고 있으리라.

기억이 다 나지 않는다 한들 어디 그 시간이 없었겠는가,

기억이 다 난다 하면 마음 어지러워 어찌 살아낼 수가 또한 있겠는가,

지금은 지금을 사는 중, 지금은 지금을 살아야 하는 것.

그나저나 옷은, 나이가 옷을 입는다고, 중부지방의 비대한 몸의 살은

이제 저렇게 하늘거리는 옷이 제 옷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양한다.


오후, 뜻밖의 방문객이 있다.

미리 한 약속이 아니라 청소를 하던 식구들이 돌려보내려는 것을

목소리가 익어 내다보니 황간역의 음악회를 주도하고 있는 이다.

판소리 공연을 간 적이 있는.

차를 낸다. 물꼬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가 된다.

최근, 지역에 계신 분들한테 물꼬를 안내할 기회가 자주 있어야겠다 생각하던 차다.

물꼬가 살아왔던 시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감동하셨단다.

“그런데요, 말은 번지르르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봐야 지금 들으신 말씀들은 ‘말’인 걸요.”

말이야 어찌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아무쪼록 이곳의 삶의 숨결을 읽어가셨으면.


부담스러움은 잠으로 오고,

부담을 해소할 기재를 찾으며 잠을 몰고 나니 어느새 자정에 이른다.

그제야 문건 작업 하나 가능해지는.

어려운 글 한 편을 쓰고 있다.

지역 어르신이 좀 움직여달라는 호소이다.

아, 무너져 내리는 달골 뒤란 절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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