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20.달날. 비

조회 수 734 추천 수 0 2015.05.27 11:57:59


작은 울타리 하나를 박느라 망치질만 두 시간을 한 저녁이었네.

달골 보도블록이 있는 안 쪽 작은 꽃밭 있는데,

그게 돌투성이어 꽃이라고 몇 없이 힘 좋은 토끼풀만 무성한데,

그마저도 사람들이 자꾸 발을 들여놓아 수선화가 밟히기

안 되겠다 작은 울타리라도 짧게나마 표시로 두자,

그렇게 만든 울타리였고, 긴 말뚝도 두 울타리에 두 개씩 달았다.

그런데 말뚝이 너무 깊었나, 튼튼은 하겠다만,

말뚝 네 개 박는데 소사아저씨랑 번갈아 망치질을 하며 무려 시간이 그리 훌쩍 간 저녁.


아침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고, 면장님이랑 면담이 있었다.

일이야 달골 기숙사 뒤란 건.

이리저리 길들을 같이 찾아보고 있다.

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일 것인가, 군수님이 움직여야 하는가,

아니면 군의원님 손으로 넘어가야 할 공인가,

서로 따져보고 있는 중.

물꼬의 관심이야 뭐 누구 손이라는 데 있겠는가. 일이 되느냐에.


물꼬랑 비슷한 시기에 지역에 자리 잡은 한 문화단체장을 만난다.

“(내가 시골에) 너무 일찍 들어왔어요.”

황토집도 짓고 작업실도 만들고 포도밭도 가꾸고 버섯 단 표고목도 좀 세우고,

농수산부 마을사업까지도 하던,

아주 의욕적으로 일을 해오던 그였다.

하지만 문화상품이 넘쳐나면서 흔치 않았던 그의 일이 이제 널린 사업이 되고,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기예를 가진 것도 아니고,

삶이라도 깊어지면(굳이 말해야 하나 싶지만, 정신적 풍요로움에 대한 얘기다마다) 좀 낫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조차도 아니고.

아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고, 영재라던 그 아이는 겨우 대학을 들어갔단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들은 뜻 아니게 아비한테 배신을 때리고(뭐 뭐라고 달래 표현하기가...).

그가 꿈꾸었던 삶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일군 삶의 터전에서 자신의 작업을 충분히 하고 살겠건만

“애들이 커가니 돈은 더 필요하고...”

지친 그를 보는 건 힘이 들더라.

가난한 살림에도 콩닥콩닥(아이들의 콩콩거림 같은 경쾌한 삶을 표현하는 의성어임) 살고 있는 물꼬살이가 기특했고,

그저 나날의 삶에 기쁜 산골살이가 더 빛난 오늘이었다 말하면

그의 곤궁함과 피폐함(겉이야 멀쩡하였지만)을 통해 역설적이게 내 평안을 확인하였노라는 얌체려나.

적어도 우쭐함은 아니길.


저녁을 먹다가 소사아저씨가 무슨 말 끝에 오랜 시간 마음에 품어왔던 말씀 꺼내셨네.

물꼬에서 살면서 고마웠던 순간, 힘이었던 어느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 참.

“나도 딱 하나 있는데...”

‘꼭 그거 한 가지였다’ 그런 말이기보다 ‘그 무엇에 앞선 까닭 하나가’ 라고 이해되는.

“옥샘이 없었으면...”

그러니까 ‘물꼬가 없었으면’으로 치환되는.

‘삶을 막 살았을 거’라는, ‘사람도 아니었을 거’라는, 그리고 ‘꽉 죽어버렸을 거’라는.

세상에 무슨 즐거움도 없고 희망도 없고 기대도 없는.

그러다 물꼬에 살면서 소소하게 행복하고 당신 일이 있어 즐겁고,

게다 더 나아가 가치도 있고(“애기들도 좋고, 어른들도 오면 좋아하고...”),

그러면서 사람 꼴 하고 살고 있다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 역시 이 산마을에서 삼촌 아니었으면 물꼬 일을 어찌 했으리.


빌 어거스트(<정복자 펠레>, 1987>)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미드나잇 인 파리>와 <로마 위드 러브>를 잇는, 것으로 보이는, 하지만 다른.

제레미 아이언스가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인생이란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이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위한 여행도 시작된다.’

극중 아마데우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의 한 구절마냥.

(영화는 독일 파스칼 메르시어의 원작을 성실하게 담은)

고전문헌학을 오랫동안 가르치며 건조하고 단선적으로 살던 교사 레이몬드 그레고리우스는

폭우가 쏟아지던 출근길에 자살하려던 젊은 여인을 구하면서 삶에 멈춰 선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에서 라비크가 조앙 마두를 구하듯.

그레고리우스는 여인이 남긴 외투의 주머니에서

포르투갈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발견하고,

무작정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르며 프라두의 생의 궤적을 좇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이야기는 액자소설로,

포르투갈에서 40년 가까이 독재가 이어지던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1973년이 배경.

(군인들까지 합세해 총칼과 장갑차에 카네이션을 꽂아주던 무혈 ‘카네이션 혁명’은

74년 4월 25일 안토니오 살라자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다)

프라우가 사랑하는 여성에게 함께 먼 곳으로 떠나자 할 때

여성이 밀친 사랑이 인상 깊더라,

남은 모든 인생을 그와 함께 보내는 것에 두려워진.

‘이런 삶은 내 삶이 아니다, 당신은 내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원한다.’

그리고 떠난.

달달한 ‘지금’을 냉정하게 팽개치고 홀로 ‘섬’이라...

그 여성으로 남은 영화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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