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당장 긴 속옷부터 벗어야했다.
신록도 내 생각보다 빨랐고, 기온은 더 달렸다.
파리에 있던 한 주 동안 봄의 한가운데 대해리에선 30도를 기록하고 있었다고.
달골 데크의 작은 화분은 말라버렸더라, 아차차.
도시 파리가 날마다 비와 맑음 사이를 오가고 있을 때
대해리에도 하루는 종일 흐리고 비가 다녀가기는 했더라고.
모종포트에선 호박과 옥수수와 수세미가 자랐고,
밭에는 열무씨를 뿌렸고 땅콩을 놓았고,
4월을 마무리하며 감자싹이 올랐다 하고.
풀을 뽑고 또 뽑으니 4월도 그리 뽑혀버린.
영화로 시작해서 영화로 끝난 파리 인천 간 비행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쉬면서 또 한 편의 영화를 더했네.
세간이 시끄럽던 <인터스텔라>도 이제야 보고 <위플래쉬>도, 또 두엇의 고전들도.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감독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아내이고 엄마이고 저명한 언어학 교수인 앨리스(줄리앤 무어)의 알츠하이머 투병기?
앨리스는 사라지는 기억을 슬퍼하고 절망하는 대신
기억을 잃어가는 속에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상황을 직면하는 데 집중한다.
‘스틸 앨리스(여전히 앨리스)’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영화는 한 장면으로 혹은 한달음의 대사로 전체를 잘 전하더라.
감독의 의도를 드러내는 전략으로도 주로 쓰이는 ‘대사’.
“제가 고통 받는다고 느끼지 마세요. 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를 쓸(Struggle)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들 앞에서 한 앨리스의 짧은 연설 한 대목이다.
그리 존엄을 유지하며 죽음으로 향할 수 있다면...
<와일드; Wild>(원작: 셰릴 스트레이드의 자전적 동명 회고록)
감독 장 마크 발레.
셰릴(리즈 위더스푼)은 인생의 전부였던 엄마를 잃고 방황한다. 마약중독, 섹스, 이혼...
그는 이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배낭 하나에 의지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걷기로.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장장 4285㎞에 달하는 구간.
걷고 또 걷는다.
‘걸었으므로’ 삶의 전환이 가능했었을.
<우아한 거짓말>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p.7)
첫 문장이 마음을 쿵하고 내려놓던 소설.
천지는 고작 열네 살 아이, 그가 떠났다.
기대치 않았고, 발견한 영화가 되었다.
기교 없이 원작에 충실해서 책처럼 읽었다, 보았다.
별 생각 없이, 혹은 우아한 거짓말로 누군가가 죽음에 이르는 죄는 짓지 말기를,
우리 아이들이 구원의 소리를 울릴 때 놓치지 않기를.
“괜찮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