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 딱 그거.
새벽부터 밭에 있었다.
6월 빈들모임에 여러 날 손을 보탠 이웃의 밭은
작은 존재들에게 밀림일 것 같은 기세의 풀들이 좋다구나 무성했다.
예취기를 돌릴 때 어린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자두나무를 중심으로 손으로 풀을 맸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밭이고 집이고 길가에 있으면 안 돼.”
오며가며 다들 입에 올리신단다.
자두가 왜 이러냐, 농사가 어떻네, 풀을 왜 이리 놔뒀느냐,
그 말이 더 힘들어 몰리듯 일을 하게도 된다고.
“우리 밭 같네.”
학교 서쪽 길 아래 있는 물꼬의 밭도 늘 그러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입이 농사를 다 지었더랬다.
오후에는 숨을 좀 돌린 뒤
분갈이를 위해 창고에 있던 빈 화분들을 꺼냈다.
흙을 채우고 새끼를 친 다육들을 나눠주고.
저녁에는 대체의학모임.
‘의료주권’ 회복을 위해 해온 일들 가운데 하나라지만
산골에서 아이들이 드나들 때 무엇보다 요긴한 일이라
오랫동안 해오던 공부 가운데 하나.
가까운 곳의 한 지자체에서 시도하던 한국형 엘 시스테마 프로젝트가
결국 흐지부지 끝나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엘 시스테마. 한동안 ‘트라우마’라는 낱말처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낱말이었다.
베네수엘라의 지하차고에서 극빈층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시작되었던 그 프로젝트는
LA필하모닉을 이끄는 구스타보 두다멜이 그 프로젝트의 수혜자로 알려지며
더욱 세계적인 찬사와 관심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그 시도가 있어왔다.
그런데, 가난한 삶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있었으나
우아하고 격조 있는 클래식을 가난 아이들에게 맛보게 하자던 생각은
실제 가난과 진짜 험한 삶 앞에서
음악가들과 담당자들은 뱀꼬리가 되거나 쉬 중단했다.
시혜나 베풀러 들어간 학출(대학생출신)들이
노동현장에서도 농촌현장에서도 빈민현장에서도 나가떨어졌던 광경을 목도하며
80년대를 보냈더랬다.
깊은 연민과 존중과 사랑 그리고 의지와 뜻이 필요한 일.
무섭게 오래 걸어갈 수 있어야 우리 아이들 중에도 구스타보 두다멜을 만날 수 있을 것.
그런데, 엘 시스테마는 음악을 통한 ‘사회개혁운동’이었다,
극빈층 아이들을 구제하고 그 아이들의 사회진출을 돕고
나아가 문화적 차별과 소외를 해결하여 빈부격차까지 좁혀가는.
음악을 통한 사회개혁의 일환이었던 것!
이 아이들로 구성된 교향악단 이름 ‘시몬 볼리바르’는
남미의 자유와 연대와 저항의 상징 인물.
그 시사하는 바를 되새기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