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27.나무날. 소나기

조회 수 652 추천 수 0 2015.09.18 08:33:02

 

밭에 알타리무씨를 뿌리다.

베짱이 주간 나흘째.

물꼬의 오랜 논두렁 한 분을 뵙다.

그사이 문화재단을 만들고, 인문학 젊은 지성들을 기르고 계셨다.

해마다 두어 번 뵙고 세상사는 얘기와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점검하고는 하였는데

올 초 큰 수술을 하여 못 뵙고 이 해가 가나 쉽더니...

그 사이 허리가 굽고 살이 빠지고 홀로 몇 해의 세월을 더 사셔버렸더라.

다행하다, 다행하다, 다행하다, 사람을, 깊은 벗을 떠나보내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으랴.

 

그대는 왜 시를 쓰는가.

그대는 왜 시를 읽는가.

그대는 시를 읽기는 하는가.

우리에게 시는 무엇이었던가.

<시의 힘-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서경식/현암사, 2015)를 펼치다.

‘인생은 짧다. 그러나 ‘시’라는 형식을 빌리면, 21세기의 일본 사회를 살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 80년 전의 루쉰, 60년 전의 나카노 시게하루, 그리고 조국의 과거 시인들과 교감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50년 전에 쓴 시(비슷한 것)까지 새삼스럽게 되살아나 나를 채찍질한다. 이러한 정신적 영위는 모든 것을 천박하게 만들고 파편화하여 흘려버리려 드는 물결에 대항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저항이다. ‘저항’은 자주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 한국어판 서문 가운데서

 

제 생각을 쓰는 독후감도, 심지어 요약도 아닌 옮겨쓰기는 얼마나 무성의한가.

그러나, 밑줄 긋는 것만도 용한 사람도 있으니.

 

p.54~55

...

여기서 사이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인간은 승리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가 이기고 있기에 정의에 관해 묻고, 허위로 뒤덮여 있기에 진실을 말하려고 싸운다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자로서 가져야 할 도덕(moral)의 이상적 모습이다.’

(그는 이미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이렇게 천명한 바 있다.

“사이드는 ‘멸망할 운명임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이 말이다.”

p.289 권성우의 작품해설 가운데서.)

 

p.108~111

‘생각해보니 희망이랑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의 말미에 적어둔 이 말을 “명랑한 언설로 앞길의 광명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하는 자들의 구령처럼 인용하는” 예가 많다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없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루쉰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이야기한다. 암흑을 이야기한다. ...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는 태도가 아니다. 효율이라든가 유효성이라든가 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이 길을 걸으면 빨리 목적지에 닿을 테니 이 길을 간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의 유무나 유효성, 효율성 같은 원리들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언어이며 그것이 서정시다. ...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p.277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것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내려는 이유는 본문에서 루쉰의 말을 빌렸듯, “걸어가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멸망할 운명임을 알고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고, 나아간다!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

그래서 시를 쓰고, 그래서 시를 읽노니.

그리고, ‘물꼬’에서 사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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