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13.해날. 비 긋고 구름

조회 수 681 추천 수 0 2015.10.12 08:24:05


해날. 그대도 쉬어가시라.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내 9월은 그러하다.

가까운 벗을 보내고 도대체 차려지지 않은 기운으로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보름 가까이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하냐, 얼마나 고마운 우리 삶이냐.

피 철철 흘려 꿰매야 하는 게 아니라면 뭐 어떠랴, 쉬었다 가자.


그저 밑줄 긋기, 심윤경의 책 두 권.

<나......의 아름다운......정원>(심윤경/한겨레신문사,2002)

탁월하진 않아도 진의가 있고,

뛰어나지 않아도 힘이 있다.

성실함이 묻어나 아 이 사람 글을 오래 쓰겠구나, 그런 처녀작이었다.


80년 광주의 전 후반 몇 해 인왕산자락 산동네 마을의 세세한 기록.

‘정원’은 아주 가끔 안이 보이는, 아직 떠나지 않은 그 동네 유일한 부잣집 마당.

3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떠듬거리는 동구에게 동생이 생긴다.

아들 하나 믿고 살았던 할머니는 손끝 매운 엄마랑 늘 다투고,

아버지는 가운데서 조율이 힘든 속에 만만한 마누라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한다.

그 시절은 그런 게 자연스러웠다.

영주는 일찌감치 어깨너머로 한글까지 깨친 온 동네의 기린아.

심지어 돌이 되기 전 엄마를 옹호하기까지 한다.

p.44

제 생일 전날 감히 엄마에게 발길질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분기탱천해 제가 끌어안고 있던 오뚜기 장난감을 집어던진 영주.

“떼찌야.”


학습장애를 겪는 동구에게 담임 박영은 선생의 등장은

애정과 정성을 가진 이가 한 사람의 생애에 어떤 서광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려 깊고 따뜻한 동구에게 담임은 더 큰 세계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80년 광주로 내려간 선생은 무성한 소문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는다.

p.117

중요한 건 엄마와 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은 어른들의 일이라는 거.

돕고 싶어도 잘 안 될 수도.

그들은 오랫동안 당신들의 방법으로 살아오셨기에.

오늘 방법은 마음속에 잘 묻어두고 커서 실천에 옮기라.

일단은 마음을 헤아려주고 아버지나 할머니나 엄마에게 힘이 되는 큰아들이 되면 어른들이 기뻐할 것.


하지만 사고로 영주가 떠나고 만다. 가족 가운데 누군들 마음이 성할까.

p.273-4

우리 가족들은 마치 신호등이 고장난 네 갈래 길에 각각 서 있는 당황한 사람들처럼, 서로 말을 걸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로 바라만 보게 되었다. 우리의 소통이 엉키지 않도록 요술 같은 방법으로 누군가는 기다리게 하고, 누군가는 직진하게 하고, 누군가는 좌회전하도록 지도하던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는 교차로를 지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p.283

며칠 전에 할머니에게 고추장독을 안기던 날에는 틀임없이 미친 사람 같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하루쯤은 갑자기 미쳐버리는 수가 있을 것이다. 단 하루 미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남은 인생 전체를 미친 상티로 살게 된다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 동안, 그리고 그날, 엄마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하루가 아니라 사흘쯤 미치더라도 뭐라고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을, 부부 갈등을, 그리고 모두에게 남은 동생 영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해법을 제시하는 건 동구이다, 어른 누구가 아니라.

동구는 자신의 사랑하는 정원도 담임도 내놓고 충청도 산골마을로 떠나기로 한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삶을 지옥에서 건져주더라. 성인(聖人) 아니어도.

p.311

잘 살펴보면 삼층 집 정원이라고 해서 값비싼 고급 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모퉁이에는 흔해빠진 수수꽃다리도 있고, 전혀 쓸모없이 억세기만 해서 산에서 마구 뽑아버린다는 아까시나무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흔한 것이건 귀한 것이건 이곳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에는 다 같이 한몫을 하고 있었다. 삼층집 정원의 아름다움은 추운 날씨나 하늘을 찢는 번개도 끄덕 없이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한 것이지만 시멘트 한줌, 어느 난폭한 손목의 돌팔매질 한 번이면 곧바로 상처 입을 수 있는 여리디 여린 것이기도 했다.


흔한 것이나 귀한 것이나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다 같이 한몫하노니,

강하기도 하지만 쉬 상처 입을 수도 있노니,

사람은 그러할지라, 삶은 그러할지라.


<사랑이 달리다>(심윤경/문학동네, 2012)

p.302

나는 네 아빠를 정말로 사랑했고 네 아빠도 그랬단다. 우린 정말 치열하게 사랑했어.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거야. 끝까지 잘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끝나더라도 크게 여한은 없어. 인생을 건 진짜 사랑은, 그 자체로 훈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헤어지게 마련이니까.

사랑은 비명보다도, 운명보다도 빨리 달린다.

p.347

그를 향한 나의 혈중애정농도는 언제나 면허취소 수준이었다.

나는 당신 보는 재미에 보육실에 나였어요.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열심히 일하다보니까 어느새 내가 조금 나은 인간이 되었더라고요. 사람이 일을 하면 강해진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강해지는 느낌이 정말로 좋았어요.

p.354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다. 내 멀쩡한 가정이나 그의 자식 딸린 가정이나, 깨기 쉬운 건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작은오빠 대신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욱연을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바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사랑은 비명보다도 운명보다도 빨리 달린다...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

사랑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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