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불날. 비

조회 수 675 추천 수 0 2015.11.23 15:22:37


이른 아침 잠을 깨우던 비는 종일 그리 내렸다.

떡비라.

여름엔 잠비, 가을엔 떡비라.

한창 농사철인 여름, 비를 핑계로 늘어지게 자며 쌓인 피로를 풀고 간다는 여름비에 견주어

풍성한 가을, 비 내리면 내친 김에 떡을 해 먹는다고 떡비라는.


한 중등 대안학교에 건너가기로 한 날이다.

올 들어 예닐곱 차례도 넘게 소식이 들어왔는데,

함께할 자리를 만들지 못하다 드디어 걸음한다.

교장으로 가 계신 어르신이 두루 근황도 나누고 의논도 하고 싶다고

물꼬에 다녀갈 짬을 보셨으나 번번이 틈을 드리지 못했다.

학교 터를 옮기려 알아보는 시기이기도 하여 생각이 많으실 때.

예전 대안학교에서만 하던 특유의 영역들이

혁신학교며 제도학교들이 일정정도 그 내용을 담지하게 되면서

대안학교로 몰리던 관심과 입학지원이 주는 때에

물꼬의 오랜 경험(한편 실패이고 한편 성공이기도 한)을 나누는 자리였다.

아이들 걱정할 때가 아니다, 어른들이 잘 살고 행복해야지,

그래서 어른의 학교로 더 비중이 넘어가고 있다,

또 제도학교에 반하던 학교였던 과거와 달리 현재 물꼬는 제도학교를 지원하고 보완한다,

현재 물꼬의 순기능은 학교태보다 쉼터 치유터 치료터의 기능이 크다,

대안학교는 여전히 대안을 고민하는 학교이지 않겠냐,

기존의 형태를 고집하기보다 시대를 읽으며 가야지 않는가,

그런 말씀들 드렸다.

여러 공동체와 대안학교들의 최근 걸음도 그 결에 들었네.

중요한 건 언제 시작했느냐, 얼 만큼의 규모냐가 아니라

지금 어디 있느냐, 계속 걷는가가 아니겠는지.

연재중인 소설의 189회를 쓸 시점에 나쓰메 소세키는 원고지에 189라고 쓰고 죽었다.

쓰다가 죽고 그리다가 죽고 노래하다 죽고,

물꼬에서는 물꼬의 삶을 살다 죽기를.


밤, 마침 방문했던 대안학교랑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튼 선배네를 방문했다.

풍물하던 교사들 대여섯 가구가 경북의 한 깊은 산골에 자리를 잡았다.

십여 년 간간이 소식만 듣다 만난 선배 부부교사는

아이들과 더 이상 교감할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했고,

날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눈꼽을 떼는 일이 지긋했다며

요샌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는다 했다.

학교는 또 훌륭한, 경험 많은 교사들을 또 그리 잃었겠고나.

어제 만난 듯했다. 좋은 관계들은 그렇더라.

손위 할아버지는 있어도 손아래 형님은 없는 법,

한 번 후배는 평생 후배, 종알종알 아이처럼 지나간 시절을 풀며

‘지금’을 정리하였네.

직업을 갖지 않을 자유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마침 물꼬의 11월 섬모임 텍스트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소비를 하지 않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인가?”

“직장에 고용되지 않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인가?”

경제 불황, 취업난, 대량 실업, 비정규직 문제 등에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라는 위험하면서도 이상적인 제안을 하는 일리치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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