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30.달날. 흐림

조회 수 809 추천 수 0 2015.12.14 06:24:28


오래 흐리고 있는 하늘이다.

금룡샘은 새벽기차를 타고 떠났다. 생애 처음 했다는 김장에 곤하셨을 테다.

역을 떠나는데 막 라디오에서 최치원 선생 글 하나 흘러나왔다.

가야산의 금천사 주지에게 지어주었다는 한시.


笑指門前一條路 (소지문전일조로) 웃으며 문 앞 한 가닥 길 가리키며

縡離山下有千岐 (재리산하유천기) 산만 내려가면 그곳에 천 갈래 길이 있다 말씀하시네


저 산길을 내려가면 길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는데,

어디로 갈 지(인생이?) 모르면서 사람들은 길이 좁네 어쩌네 한다,

그런 말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돌아와 원문을 찾아보았다.


白雲溪畔創仁祠 백운계반창인사

三十年來此住持 삼십년래차주지

笑指門前一條路 소지문전일조로

縡離山下有千岐 재리산하유천기흰


구름 시냇가에 절 짓고서 / 줄곧 삼십년을 거기에서 사시는데 /

웃으며 문 앞 한 가닥 길 가리키며 / 산만 내려가면 그곳에 천 갈래 길 있다 말씀하시네


삶의 많은 길 가운데 한 길일 뿐이란 말인가,

어느 길로 가든 네 맘이란 말이런가,

네 갈 곳 모른단 말?

어느 길이든 다 한 세상, 생을 사는 건 매일반이란 말은 아닐까...

어쨌든 최치원 선생은 삼십년을 한 자리에 자리 틀었던 주지 스님을 좇아서였던가

가야산에 들어 생을 마쳤다.


산판일 다니는 면소재지 만희샘네 차량을 장순샘이 끌고 나타난 오후였다.

돌탑을 치우기로 한 날이다.

드디어 가마솥방 앞 돌탑이 10년도 넘어 되는 세월을 뒤로 하고 사라진다.

한 시절이 그리 지난다.

2004년 3월 22일 달날부터 한 주 동안 괴산 이 쪽 끝 상주에서

불교학교에서 강의하던 이상국 선생님 건너와

본관 들머리 양쪽으로 돌탑 두 기를 쌓아주셨더랬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 해 늦은 태풍에 무너지고,

나머지 한 기가 지난 10년 물꼬의 시간을 지켜봐주었던 것.

(무너졌던 한 기를 이후 다시 올려주셨으나 또 무너지고 말았더랬네.)

학교아저씨와 열택샘, 류옥하다가 돌을 실어 날랐고,

논두렁 주훈샘도 오셔서 팔 걷고 한바탕 돌더미를 옮기기도 하였더랬다.

그 많은 돌은... 2003년 겨울 계자에 샘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계자를 진행하고

한 패는 아침 먹고 나서서 저녁까지 날마다 계곡에서 날랐던 돌.

선생님 댁으로 돌아가시던 걸음에

거제도에서 족보와 함께 왔던 진돗개 가운데 한 마리가 따라가기도 했다.

나머지 한 마리가 지금 전나무 사이에서 물꼬를 지키는 ‘장순이’.

선업을 쌓을 수 있어서 더 좋다시던 선생님은 이제 더는 이 세상에서 뵐 수 없다.

돌탑이었던 돌들은 소나무 앞에 부려졌다.

고래방 앞에서 솟대를 안고 있는 소도도 소나무 곁으로 옮겨져

돌탑과 솟대와 나무가 함께 ‘소도’로서의 자리와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깊어지지도 않은 겨울 벌써 봄을 기다린다.

돌무더기 옮기는 마지막 작업에 만희샘도 손 하나 보태고,

모두 기울이는 곡주에 저녁버스로 막 들어온 서현샘이 또 손 하나 더하였네.

참, 금룡샘이 가져왔던 달골 지도를 가지고

장순샘과 올라 둘러보고 굴삭기 다음 작업과정도 설명했다.

해가 가기 전 작업이 가능할 수 있으려나.


응, 서현샘이 왔다,

와인과 치즈와 빵과 과일, 계자에서 아이들과 구워먹으라 머쉬맬로우까지

딱 반가울 꾸러미들을 안고.

그리고 곧 생일을 맞은 한 식구를 위한 작은 선물까지.

사흘의 휴가를 얻었다 했다.

가벼운 저녁을 먹고 밤길을 걸었다, 돌고개까지.

언제 함께 그리 섬을 걷기로도 한다.

밤, 모과도 썰었다, 차가 될.

에고, 집에 설탕이 떨어지는 날이 다 있고나.

잼이고 효소 일이고 많으니 늘 챙기는 것이건만.

하여 모과차를 ‘만드는 중’이 되었다.

그리고 늦은 밤, 난롯가에서 찬찬하게 오래 나누는 이야기.

“좀 이상해요.”

일이 많아 늘 그러기 어려웠으니 낯설기도 한 풍경이었을.

달랑 둘이서.

우리 삶이 여기 이르도록 만났던 순간들을 나누었고,

우리들의 가까운 내일에 대한 두어 가지 계획들을 세웠다.

실은 이런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문장을 생각했다.

“눈 왔나...”

깊은 밤 가마솥방을 나서니

바깥 해우소 불빛에 드러낸 운동장 얼굴이 하얗게 번득였다.

새벽 2시에 다 이르도록 앉았었고나.

서리더라.


사랑은 관계의 총화(總和)이고 또한 총화(叢話)이다.

전체를 합한 것이란 의미에서 앞이 그러하고,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에서 뒤가 그러한.

사랑은 자신을 둘러싼 여타의 관계를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를 집약적으로.

나는 늘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밀어붙이고는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걸 필요로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끝까지 나를 포기해주지 않은 이들만 곁에 남았다? 그런가 보다, 하하.

그리고 그런 게 생겨난 자신의 배경이 있을 테지.

그것을 이해하면 삶이 좀 덜 고달파진다.

반복되거나 알 수 없는 감정의 뿌리를 찾고 이해하는 작업을 사람들과 계속 해나가지 싶다. 그리고,


<이성복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한 구절을 읊조리나니.

p.336

때로 내 논리를 내 삶이 따라잡을 수 없을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쓴 글들을 오래 들여다본다. 논리와 간극 사이에 내가 있다. 나는 ‘지향(指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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