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 4.쇠날. 갬

조회 수 767 추천 수 0 2015.12.24 00:29:08


찬 날로 가는 길이 서둘러지니 마음이 덩달아 바쁘다.

저녁, 바람 매웠다.

부엌 곳간에 커튼 한 짝 더 달다.

밥상머리무대에서 자리를 한참을 지키고 있던 이불이며 꿰맬 것들, 재봉질 하였다.

가마솥방과 부엌 청소도 후련히.

옛 목공실 안 비닐 뒤 어제 쌓인 눈을 치우고

복도뒤란도 보일러실 오가기 좋게 눈을 걷었네.

운동장 패인 곳에 연탄재도 옮겨 깨고.

오후, 다시 날리는 눈.

아무래도 12월 위탁교육은 못 하겠다.

바깥수업들 종강도 해야 하고, 계자 준비도.

피 철철 흘리는 아이의 상황이면 모를까 좀 미루어도 되겠다.


시집이 하나 왔다.

벌써 세 번째 시집을 낸 그이.

그의 시가 대단히 좋은 시라 치켜세울 순 없지만

감각 있고, 열심히 썼다.

무엇보다! 그는 썼고 나는 쓰고 싶기만 했다.

그가 훌륭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야말로 ‘시인’이다, 쓰므로.


한 국립대에서 2회의 강의요청.

이 달은 너무 빠듯한데.

1월로 넘기는 건?

하지만 그때 학생들이 모이기 쉬우려나.

그런데 요새는 또 그렇지도 않다네.

긴 방학이라고 아이들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고.

우선 이 달에 어찌어찌 서로 짜보고

아니면 계자 이후로 잡기로 한다.


올해 본(개봉이 아니라!)최고의 영화는 장률의 <경주>였다.

아파트에서 창문을 열 때도, 길을 걷다가도, 도시 어디에서나 무덤이 들어오는 곳.

장률의 영화에서 언제나 공간은 중요하다.

어떤 지역이 지닌 고유한 분위기와 정서가 인물과 이야기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풍경>,<이리>가 그랬고 <경주>에서도 변함없이.

경주는 익숙한 곳이고,

그만큼 또한 알던 공간이라 역설적이게 더 낯설게 보기 또한 쉬울 수 있었을 듯한데,

굳이 이방인의 눈이 아니어도 꿈과 현실의 넘나들기에 그럴 수 없는 공간이고 있었다.

영화는 살아있음 위에 능이 배경으로 늘 있다,

입 맞추는 고교생의 연애장면이 능 앞이라던가 하는.

그리고 몇 개의 죽음이 등장한다.

선배의 부음을 받고 중국에서 온 최현, 남편과 사별 후 찻집을 운영하는 윤희,

경주에서 우연히 만난 모녀의 자살, 스쿠터 젊은이들의 충돌사고.

영화는 군더더기나 꾸밈이 없다.

여유롭고 재밌고 아름다웠다.

여유롭다는 건 아마도 전작들이 구석진 사람들 이야기이므로 삶에 틈이 없다가

계급적으로 그런 계층을 벗어났기에 가능했을 수도.

재밌다는 건 사시사이 양념 같은 유머들 때문이고,

아름다움은 잘 찍은 이어붙인 사진첩 같은 장면들 같았다는 의미에서.

영화는 시로 읽혔다. 그럼에도 영상이 필요한, 그야말로 영화.

아마도 자연광을 최대한 썼으리라 짐작되는 빛으로도 많은 말을 했다.

정원과 방의 빛의 차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이 인물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치고...

영화는 느렸다. 장률의 다른 영화들도 그러하듯.

그런데 묘한 긴장감이 있고 그만큼 속도감도 있었다.

뒤가 궁금해서 자꾸 넘겨다보는 소설의 끝 페이지 같이,

누가 범인인가, 극이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서 도저히 다음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거의 모든 쇼트가 고정쇼트와 잔잔한 패닝으로 이루어진 영화에서 그걸 가능하게 하다니!

그의 영화를 보면 시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말 그대로 흐르는 ‘시간’이 느껴진다.

만질 수 있고 무게가 느껴지는 시간.

그러니까 그의 영화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으로 보인다.

내내 등장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고요하던 카메라는

풀숲을 헤치고 최현에게 다가갈 때 갑자기 핸드헬드로 요동친다.

그리하여 스탭도, 등장인물도 아닌 제3의 존재,

신이거나 최현을 죽이려 갔다는 전 여자친구의 남편이거나가 지켜보는 눈이 된다

(그래서 어쩌면 최현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산 사람들 주변을 능처럼 배회하던 죽음이 그렇게 주체가 되는.

장율은 늘 경계를 다룬다는 생각, 몽골 유목민이 등장하던 영화 제목도 <경계>였지,

폭발 직전과 폭발해버린 도시, 조선족 여인, 한국의 이주노동자...

경주라는 도시가 그렇듯 <경주>에서 꿈과 현실은 공존하고,

사실 우리 삶이 늘 그렇지 않은가 얘기하는 듯.

하여 춘화의 글귀처럼 ‘한잔하고 가세’.

장율의 다른 영화만큼 이 영화도 역시 그러하였다.

경계가 좋고, 여운이 좋고, 상징이 좋다.

이번 영화에선 욕망으로 읽을 법한 담배의 등장이 곱씹어지더라.

봉자개 그림과 싯구도 맴도노니.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박해일은 이름값을 했고, 신민아는 예쁜 배우라고만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가서 좋았고,

눌리지 않는 신소율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좋은 배우의 발견.

어어부 프로젝트 백현진의 노래 ‘사랑’도 눈부셨다. 그의 속물 연기도 좋았고.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텅 빈 방 안에는 텅 빈 니가 있네

텅 빈 니 눈 속에는 텅 빈 내가 있네

아무도 모르게 너와 내가 있네 지금

난 눈 감고 생각하네

기억 두려움 시간 슬픔

너는 눈 뜨고 되뇌이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누런 달빛 아래서

텅 빈 술병을 들고

오늘의 운세를 볼 때에

맑은 바람이 분다

이윽고

너와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어떤 사람이

뜨거운 기계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되뇌어본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아,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겹쳐지기도. 물론 결이 다른.

윤대녕의 <천지간>도 묻어난.

'천지간 사람이 하나 들고나는 데 무슨 자취가 있을까’만

어딘가에 자국이 남는 우리 생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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