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 7.달날. 흐림

조회 수 679 추천 수 0 2015.12.24 00:31:53


“불안정성은 존재가 중심을 유지하려는 긴장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한 이틀 좀 떨어졌던 기온은 다시 봄날이다.

은행도 말리고 데친 무청도 말리다.

논두렁 금룡샘에게서 온 몇 가지 물건, 지도며 탁상달력이며.

늘 요긴한 것들을 챙겨 보내주신다.


한 대안학교 학부모의 전화가 있었다.

물꼬의 계자 아이였고, 지금은 대안학교 졸업반.

그 학교 아이들도 만나달라는 청.

기회 닿으면.

요새는 오라 해도 할 말이 있을 때만 간다.

물꼬의 인연이야 물꼬로 오면 될 일이겄다.


창운샘한테 글월 하나 부치다.

품앗이일꾼이었고 벗인 학부모인 창운샘과 아이한테 준 글월.

교사노릇하며 부끄러운 일이 왜 없었겠냐만

그 가운데 가장 엎드려야 하는 순간에 대한 고백이고 무릎 꿇는 일이었다.

먼저 변명부터.

그럴싸하게 말하면 일종의 사건 배경이라 할 것인데,

말 그대로 변명이니 구차하게 글의 앞에 두었다.

“제게 추위는 제 삶의 3대 공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산마을에서 추위란

시베리아 벌판으로 아침마다 일을 나서는 벌목꾼들의 각오 같은 것을 날마다 요구하지요.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이미 찾아드는 겨울에 대한 공포가

산마을에서 제 가장 큰 적이겠습니다.

타고난 거지요. 적응이 안 됩니다.

선한 일에 복무한다, 시대가 어디로 가도 여전히 생각한 대로 살아보겠다,

삶에 대한 정성스런 태도를 기르는 것이 중요한 교육의 하나이다,

힘겹지만 그래도 주로 즐겁고 주로 행복하니 족하다,

(가난한 자가 그 정도의 정신적인 기준이라도 없다면 심하게 갈등하며 살았겠지요.)

그런 생각이 그나마 아직 물꼬에서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지요.

어쨌든, 지금도 겨울이고, 겨울은 언제나, 아마도 앞으로도 오래, 사투, 사투입니다, 제겐.”

하여 2008년 그해 겨울 계자에

혹여 아이한테 상처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사건 하나 전하다.

그 겨울에도 여느 계자처럼 우리는 산에 갔다.

겨울 산오름은

마을 뒷산이라고는 하지만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간단치 않은 길이라.

모험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고,

고난 앞에 우리를 단련하는 시간이기도.

오직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배움이라 여기는.


거기 그해의 장갑 건이 있었다.

물꼬에선 요새를 꼼꼼하게 읽는 분이라면 궁금도 하시리라.

글을 옮기기가 쉽지가 않네...

“목장갑이며 예비용 장갑을 샘들 배낭에 넣어 가는데,

그 겨울엔 산꼭대기에서 이미 동이 났더랬습니다.”

그런데 손끝이 젖은 아이에게 나는 장갑을 벗어주지 못했다.

아무리 그 아이가 고학년이었다 해도.

“거기엔 내가 쓰러져선 안 된다, 이 모두를 책임져야 할 내가 쓰러질 수는 없다,

추위를 버틸 재간이 없겠다는 나약함이 있었고,

5학년이라는 아이의 나이도 한몫했습니다.”

물론 아이가 금세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면 또 달랐을 수도.

약간 통통했던 아이는 나보다 추위 앞에 더 잘 견딜 수 있다 보이기까지.

아직은 그가 씩씩해보였던.

“그렇더라도, 그때, 저는, 손가락을 자르게 되더라도 장갑을 벗어야 옳습니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영영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슴에 큰 바위로 남은 일이었고,

부끄러웠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칼날이 되어 주어왔습니다.”

하여 눈 덮인 겨울 산의 가파란 벼랑길을 아이를 업고 내려올 수도 있었고,

신발 밑창이 달아난 아이에게 양말과 신발을 벗어주고

돌밭을 맨발로 걸어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게 선생이고, 부모이다!

“...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시간들(특히 계자)은 말 그대로 부모를 대신합니다.

믿고 맡기시는 거지요.”

그런데도 부모가 어찌 그랬겠는가...


“창운샘, 그리고 품앗이샘으로서의 창운샘한테도 한 줄.

샘, 내 부끄러운 한 순간이 여기 모이는 우리 샘들의 모습은 정말 아닐 거요.

내 부끄러움으로 아무 조건 없이 오직 선한 마음으로 이곳에 모이는 샘들이 욕되지 않길.

샘아,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그렇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고마운 한 때 있어

서로 연락 이어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래요.

할 말이 바빠 사는 일들 묻지도 못하였네.

여여하시리라.

올해 가까운 벗들을 몇 이나 잃고 허망하였어요.

아무쪼록 건강하시라.

미안, 미안, 미안.”


용서를 빌었고,

뭐 그런 걸 여태 기억하느냐, 늙어가며 서로 기대 사자는 따스한 말을 받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우리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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