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서 9학년까지 살던 아이가 제도학교를 갔다. 2년 전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던 아이가 어느 날 대안학교도 아닌 제도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왜?
여태 잘 살았고, 앞으로도 꽤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왜?
“잘 지냈잖아!”
아니란다. 자기는 힘들었다고.
하기야 산골에서 일이야 좀 힘들었겄지. 좀 많이 시키기는 했다.
뭐 아비가 이곳에 함께 없는 삶이라
제가 남자 어른 한 몫을, 그것보다 더, 해내고 있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사내아이에게 친구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혼자서 아무리 잘 논다 하더라도.
7학년 때이던가 물꼬에 모인 또래 아이들이
너는 엄마 잘 만나 시험 스트레스 공부 스트레스 없이 좋겠다 하니 그 아이 그랬다.
나는 사는 일에 대한 걱정으로 고달팠노라,
수도가 얼까봐, 보일러가 터질까봐, 전기가 문제가 생길까봐, 이 넓은 공간 청소하느라...
그래도 그렇지, 우린 평화로웠고,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우린 충분히 유쾌한 날들이었고 넉넉했다. 필요한 게 그리 없었으니까.
하기야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자족이라도 없었다면 불행했겠지.
다행히 우린 우리 기준으로 잘 살았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학교는 왜?
또래 아이들이 하는 공통의 경험을 위해서라고 했다.
아니, 넘들도 잘 다니다가 오히려 안 다닐 생각을 한다는 고등학교를
저는 여태 멀쩡히 잘 있다 거길 이제야 간다니.
대학을 가려면 그게 쉽겠단다.
아니, 대학까지?
심지어 농부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엄마의 소망도 슬쩍 있었던 걸,
대학이 뭐냐고!
공부를 꼭 대학 가서 하나.
“어머니도 다니셨잖아요. 그리고 물꼬 같은 삶을 선택하셨구요.”
대학을 다녔기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런 부분도 있었겠지,
선택한 가난이냐 어쩔 수 없는 가난이냐,
임용을 치고 합격하고 비제도로 가느냐, 불합격하고 밀려서 남느냐 그런.
아이를 제도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안학교에 보낸 것도 아니다.
한 때 내가 꾸리는 대안학교에 구성원이었지만,
물꼬가 졸업과 입학이 있는 상설과정을 포기하면서 자연스레 아이는 가정학교를 시작했다.
(아주 잠깐 읍내의 한 초등 교장샘의 부탁으로 4학년 2학기에 잠시 제도학교를 다닌 적은 있다.
하지만 한 달을 다니고 안 가고 싶다 했다.
뭘 한다 했으면 한 학기는 다녀봐야지 했더니- 아침에 똥도 못 누고 가고, 아직도 애국조회하고, 아침 자습이라고 문제집 베껴쓰고, ...-
A4 여섯 장이던가 자기가 학교에 다니지 않아야 할 사유서를 내밀며 어미를 설득하고 그만 두었다.)
대단한 신념이거나 특별한 대안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들이 더 대단해보였다.
난 그럴 수 없어, 포기해서 아이랑 산골에서 살았다는 말이 옳다.
도저히 그 대열에 설 수 없어서.
산골에 사는 건 그냥 살면 되었지만
학교에 보내는 것이야말로 내게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자였던 거다, 어떤 의미에서.
좋게 말하면, 경쟁대열에서 이길 자신 없으니 아주 다른 방식을 택했다고 볼 수도.
어쨌든 내가 가장 쉬운 길을 택했던 거다.
아이는 가끔 일 시킬라고 아무래도 울 엄마가 저를 학교 안 보낸 것 같다느니,
내 교육에도 신경 좀 써달라느니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뭘 가르치냐, 나나 똑바로 살게,
나는 내 인생도 중요했던 거다.
그 앞서 내가 제대로 사는 것을 그가 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그렇다고 제대로 산 것도 아닌!)
고백컨대, 나는 부모의 헌신 그런 거 잘 모른다.
산골에서 우리들의 공부는 그저 삶을 사는 것이었다.
심심하고 심심하니 책은 최고의 친구였을 테고,
아이에게 꼭 해라 한 건 살아가는 행위(부모 일 도와라)에 함께하는 것이었고,
겨우 글쓰기 정도가 지속적으로 한 주문이었다.
그리하여 뭐 공부하러 굳이 학교까지 가냐 암묵적으로 거의 동의상태였던 것인데,
하기야 내일 일을 누가 알랴만.
아이의 격랑기도 한 몫.
8학년 나이부터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잘난 사춘기 말이다.
그러더니 검정고시 준비를 몇 달 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고,
학교를 갔다.
그리고, 심지어는 영어 학원도 하나 댕기기 시작했다.
아니, 학원이라니!
나도 사교육의 대열에 서다니.
어, 그런데, 이제 대학도 간다네. 이런!
이 시대 대학이 무엇이냐.
불안하니 가지, 그렇다고 불안이 덜어지는 것도 아닌.
누구 말마따나 너나없이 내 아이는 상위 몇 퍼센트가 가능하리라는 묻지마 투자를 하고
그 퍼센트는 이미 굳건하고 진입할 부류 혹은 숫자도 다 채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래도 불나비처럼 대학으로 대학으로 대학으로.
혹 상위에 들어간다고 따 논 당상 같은 삶이 있던가, 어디.
여전히 우리는 불안할저.
방법은 열등감 없이 살기. 오직 제 길을 갈 것, 누가 뭐라든!
그런데 이 아이 뇌과학, 그러니까 의대도 아니고 순수과학을 하러 대학을 갈 거란다,
학교에 다니는 게 그 길을 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고
돈도 덜 든다며.
학교에 잘 가긴 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그거다.
공부를 밀고 가는 힘의 근간이 바로 일을 하며 기른 게 아니겠는가 싶더란다.
그렇지, 그렇지,
일머리를 아는 건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늠하는 방향성과 행동성이 되니까.
부모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커졌다.
자기가 산마을에서 그간 얼마나 훌륭한 경험들을 했는가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더란다.
물꼬가 귀하고, 훌륭하더란다.
그리고 낼모레 12학년, 그 유세 많은 고 3.
지독하게 공부를 한다. 그것도 아주 잘하고 싶어 한다.
시험을 치자면 그것에 이르기 위한 객관적인 공부의 양이란 게 있지.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공부의 양은,
때론 넘들 12년 할 거 3년 하니 열심히 할 거라지만,
아이를 힘겹게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공부를 하겠다는 아이와
뭘 그리 애를 쓰냐 말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쨍쨍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만큼만 해도 여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닌데 대단하지 않은가.(좀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시골 학교이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어머니 아버지는 잘하셨잖아요.”
우리 좀 하기는 했다. 못하진 않았지. 그렇더라도 그게 공격점이 되다니.
그런데, 그 아이 한 해를 보내고 정말 이놈의 학교를 다녀야 하는가 고민하더니
다시 또 한 해를 보내고 현재 괴로워하는 중.
학교라는 제도가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심지어 비합리적이냐,
사회성을 기른다니 관계란 게 학교에서 얼마나 허망하고 허울뿐인 줄 아느냐,
교사는 직업의 하나일 뿐이라고 절망하고,
한 생을 이런 식으로 공부하며 허비해야 하는가 다시 목하 고민 중.
“언제든 그만 둬.”
선택이란 게 이거 아니면 저거지.
45%와 55%만 되어도 선택은 쉽지,
대개의 선택은 49%와 51%의 싸움.
그러면 까짓 겨우 2% 내지 근소의 차이일 때 우리는 갈등을 하는 바
어느 걸 택하든지 매일반일지라.
하든가, 말든가!
조만간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들리려나.
아이에게 말했다.
한 번 뿐인 생, 네 욕망을 똑바로 보아라.
혹시 잘난 위치를 선점해서 저만 잘 먹고 저만 잘 살고 저만 잘난 체 하려는 건 아닌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자, 우리.
어쨌든,
“그러므로(사유하므로) 너는 건강하고,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