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의 휴가라고 하자.

오래 쉼 없이 학교 흐름을 좇기 바빴고,

계자 뒤에 이어지는 한 주와 설과 한가위 명절에 이어지는 것들이

홀로 쉬는 시간이지는 못했다.

오직 혼자일 때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겨울 계자에 들어서기 전 동면 수준인 겨울날의 며칠을 말미로 얻었다.

그리고, 제주도행.

정해진 일정 없이 묵을 곳도 생각지 않고 갔다. 다만 걷고 또 걸으리라 하고.

공항에 내리자마자 아일랜드 더블린이 겹쳐졌다.

함박눈과 바람, 우박과 비, 몰아치는 바닷바람,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날씨.

마음이 그러했노니 그 마음을 날씨에 섞어 걸었다.

오늘 17일,

17일에는 17코스를, 18일에는 18코스를, 19일에 19코스, 그리고 20일에 20코스를.

일정은 그렇게 자연스레 잡혔다.

제주올레 패스포트와 가이드북이 있더라만 그런 건 그런 거 좋아하는 분들이 하시고,

올레 리플렛에 구간의 시작과 중간 끝 지점에서 스탬프를 찍다.

또 언제 오려나,

그리고 정해진 길을 따라 걷는 것이 내게 그리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고.

하루 40km씩 걷는 길도 예사였던 젊은 날에 견준다면 그 절반쯤이야.

죽어 떠난 벗과 살아 떠난 벗,

그리고 등 뒤에서 자주 잊고 달려가는, 그래서 자주 나를 불러 세우는 내 영혼이

함께 걸었다.

20년 전에 세상을 버린 벗과 동행한 마지막 여행지가 제주도였더랬다.

성산포는 내게 시인 이생진 선생님과 내 사랑하는 벗의 땅.

살아 떠난 이는 살아 있으되 볼 수 없는 곳에 있다...


17코스 광령1리사무소에서 산지천.

날밤을 꼬박 새고 이른 새벽 얼어붙은 길을 기어 기어 청주공항으로 갔다.

버스로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다시 17코스 시작점으로 이동.

11:10 출발.

여행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과 만나는. 버스에 물건 하나 두고 내린.

의도하지 않은 길을 만나는 재미. 외도 물길 20리와 그만 헷갈려 뜻하지 않았던 길을 걷기도.

대원암에서 차를 달이다.

올레길은 아무도 걷지 않고 있었다. 날이 이러하니,

그래서 외려 좋았다. 벌 받듯 걷는 마음, 고행 같은 길이었다.

그 길을 시작점에 데려다주기로만 한 벗이 혼자 보내기 불안하다 함께 걸었다.

기억하리라. 이 고단한 길을 자신의 일을 놓고 기꺼이 같이 나서준 그였다.

벗이 있어 고마웠고, 벗이 있어 걸을 수 있었던 길이었노니.

어느새 마음을 먼 곳으로 보내다 이정표를 놓치면, 생이 말했다. “까불지 마!”

그러다 또 어, 하고 두리번거리면, 안내 리본이 말했다. “의심하지 마!”

방만함으로 더 오래 돌아가기도 했고,

어둠이 내리고 도시로 들어서서 더 한참 헤매었다.

도두항에서 점심을 먹으며 쉬었던 1시간을 빼고 7시간을 걸었네.

19:15 동문시장 한 게스트하우스 도착.

아, 게스트하우스에서 물꼬의 연줄을 만나다.


18코스 동문로터리 산지천 앞에서 조천만세동산 주차장.

제주 동문시장에 가면 45년 된 금복식당에서 국수를 드시라.

언젠가 올레길을 걷던 벗이 옥돔을 예서 보내왔다.

답례로 두어 가지 말린 생선을 보냈네.

10:40 시작.

사라봉을 지나 바닷가로 내려오는 길 4.3 때 폐허가 된 마을 끝에서

네잎 토끼풀을 찾다.

빈집의 담장에서 하늘타리도 얻다. 당뇨에 좋다는.

사랑하는 이의 조카가 당뇨를 앓고 있다.

약사인 어미를 둔 그이에게 전해질 리도 없을, 나는 왜 그것을 굳이 꾸역꾸역 짊어졌던가.

19:10 도착. 8시간 30분을 걷다. 오늘은 점심도 없이.

함덕 서우봉해변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 다시 선흘로 들어가다.

거기 물꼬의 인연 하나 있다.

밤엔 작은 강연! 주경야독일세, 晝蹝夜講주사야강이라.(蹝 천천히 걸을 사)


19코스 조천만세동산 주차장에서 김녕서포구 주차장.

08:01 선흘 발 만세동산 행 버스, 08:30 만세동산 발 코스 시작.

서우봉 숲길, 내 영혼이 따라오는 소리에 자주 뒤를 돌아보다.

12시 북촌포구, 오늘은 여럿의 올레꾼들을 보다.

너븐숭이 4.3기념관. 내 삶의 엄살이 가벼워지더라, 미안하게도.

벌러진동산 어드메 쯤에서

키르키즈스탄의 한 길에서처럼 염소 떼를 몰고 가는 할아버지를 만나다.

아침에도 오메기 하나, 점심으로 오메기떡 둘. 벗이 준.

이곳에서도 이어지는 아침수행 덕일까, 아니면 오직 걷고 또 걷겠다던 의지였나,

그것도 아니면 어느 때 떠난 사랑이 아팠던 그 어느 날이 생각나기라도 했을까.

먹는 것도 없이 지독하게 걸었네.

김녕농로에서 만난 한라봉을 키운다는 아저씨,

“혼자 다니면 안 심심해요?”

좌우를 그리고 뒤를 돌아보다.

여전히 죽어 떠난 벗과 살아 떠난 벗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고,

바삐 달려가느라 놓쳐왔던 영혼이 여기서도 자주 나를 끄집어 당기고 있었다.

다시 보기 어려울 먼 곳의 벗에게서 전화가 닿았더라.

김령서포구 앞에서 끝 지점을 보지도 못하고 두 시간을 헤매고 또 헤매고

저녁이 내리는 포구 끝에서 바다로 향한 나무의자에 앉았는데,

어두워오는 바다가 자꾸 자꾸 부르기 그의 뜰 안으로 들어서고 싶었네.

저녁은 제주 사는 벗과 함덕의 버드나무집에서 만나 칼국수를 먹다.


20코스 김녕서포구 주차장에서 제주해녀박물관 정자 앞, 그러나,

끝날엔 바삐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 있었기,

19코스에 이어 월정리5km 만 더 걷는 걸로.


제주도에서도 이어지던 아침마다의 수행은 그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는 힘이었고

다음 삶을 살 수 있는 뜀틀이기도 하였더라.

만났던 모두, 우리 만남이 삶의 의욕에 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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