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1.나무날. 흐림

조회 수 701 추천 수 0 2016.01.03 01:27:58

 

 

날이 얼어붙지 않아 간밤에 제법 내린 눈이 벌써 녹는다, 해가 뜬 것도 아닌데.

고맙다.

해건지기.

마음결이 얼마나 순순해지던지, 그래서 하는 수행이겠다만.

12월은 이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주말에는 쉬어가는 해건지기였다) 아침을 수행으로 열었네.

그마저 없었으면 사람을 보내느라 호되게 신열을 앓는 시간을 어찌 견뎌냈을까.

어제오늘은 동행인이 있으니 또 따스웠던.

이 아름다운 시간을 허락한 우리 삶에 고맙기로.

그리고, 2015년도 잘 가시오. 나를 살리느라 애썼네, 그대.


오전에는 희중샘과 이웃 밭에 다녀오다.

눈코 뜰 새 없는 우리들의 시기이나 더 바쁜 밭일이 있는 이들 있으니.

흐린 하늘 안고 포도나무를 패내고 있었다.

물꼬에는 진눈깨비 날리는데, 그래도 거긴 산 아래라고 날만 흐리더라.

장갑이 젖고 바지 앞 쪽도 다 젖어들 있었다.

물꼬 식구들이 오전에라도 붙겠다 하니 말렸더랬네.

우리 형편 품앗이인 그가 모르지 않으니.

“그래도 잠시 위문은 갈게요.”

묵은 해 보내는 날 같이 둘러앉아 김나는 어묵탕과 김치부침개를 참으로 우리 훈훈하였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같이 있어 좋았네, 사랑하는 벗들이여.


연규샘도 들어왔다.

금룡샘이 인쇄해서 보내준 글집과 미리모임자료집도 도착했다. 꾸벅.

가마솥방 칠판에는 해야 할 일들이 적혀졌다.

하지만 하기로 한 일과 일 사이의 일들이 툭툭 튀어나왔고,

그러니까 말한 것은 정작 손도 대지 못한 채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일이란 일의 이름을 달지 못한 것들도 얼마나 많은가.

특히 이 산골살림에서는 더욱.

이름 붙인, 혹은 업무적 성과가 있는 일만이 일이기 쉬운.

그러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이야말로 얼마나 ‘일’인가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일 아니냔 말이다; 밥하고 치우고 빨래하고...

부엌 양념통들, 닦고 채우고; 여기서 만든 된장, 고추장, 간장, 식초, 시럽, 효소, 페이스트, ...

냉장고 김치통들, 몇 가지의 김치들이 시차를 두고 담가졌고

그건 이곳의 가을날이기도 하였다. 그 날들에 함께한 사람들의 흔적이기도 한.

묵은지도 꺼내왔다.

여름에도 잘 먹었고, 겨울도 그러하겠다.

교무실에서는 올 아이들에게 전화, 올 때 됐노라, 짐은 빠진 게 없느냐는.

그리고, 류옥하다가 밀린 사진들을 정리하여 누리집에 올려주었다.

 

자정, 해보내기 타종식이 있었다.

늘어서서 다섯 번 혹은 여섯 번씩 쳐서 서른세 차례 종을 울렸다.

삼십삼천 도솔천까지 우리의 바람이 닿으라.

잘 가라, 내 빛난 혹은 안타까운 날들, 내 고독, 내 한 때, 내 사랑, ...

잘 했거나 못 했거나 이제는 가버린 날들, 어쩌겠어, 가버린 걸.

새로 시작하는 날이 꼭 제 뜻대로 다 될 수야 없을 지라도

새로운 날들엔 뭔가를 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자, 서로 기대고 나아가기.

애쓰셨네, 그대, 그리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지라.


교무실에서 연규샘, 희중샘과 올 한해 고마웠던 물꼬의 인연들에 인사도 전하였네.

그 그늘에서 물꼬 살아왔다.
들어온 문자도 같이들 읽었네.
'올 한해 옥샘과 함께한 시간들 모두 행복했습니다.
 고맙고 즐거웠네요.'
그 말미 문장이 우리를 학교 떠나가도록 유쾌하게 하였다.
'글고 앞으로 잘할께요.'
나 살았을 적 잘 하라고, 죽고 난 뒤 후회 말라던 농이 있었던.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나 있어 행복했다니,
그대 있어 행복했노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 한 선배의 해보내기 문자도 닿았더라.

"‘새해 복’의 불공정 분배를 확신하며,

 화가 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에서 또 한 해를 보냅니다...

 그래도 새로 맞이하는 한해는, 훗날 뒤돌아보며 웃음 지을 수 있는 일이 조금 더 늘어나는,

 그런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획득하시고, 건강하게 자주 만납시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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