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개진 하늘.
서울은 황사 앉았다더니.
봄이다.
윗마을 새로 이사 들어온 어르신 한 분 걸음 하셨다.
볕 좋아 읍내 나가다 들리셨단다.
차를 달였다.
경칩인 어제 봄을 부르는 비가 격했다.
그리 모질었던 겨울도 아니었는데, 봄은 버겁게 뛰어와야 했나 보다.
사람들이 마음 안에 든 겨울이 시베리아였기 때문이었는지도.
새벽부터 식구들이 도랑을 팠다. 기락샘도 들어와 돕고.
된장집 뒤란과 앞마당 둘레까지, 운동장 가장자리 돌계단 아래들이며.
‘스무하루 동안의 치유일정’에 함께했던 이들은 안녕한가.
처음부터 끝까지 했던 몽고는
빨래를 널면서도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되게 털어서 너는 것이며
바느질을 매듭까지 야물게 하는 것이며
빈틈이 없도록 하는 걸레질이며
자잘한 일상을 나누고 훈련했던 시간이었다.
날마다 절하고 걷고 침묵하고 책 읽고 생각한 시간들,
사는 곳에서도 그 한 가닥 이어가는가.
밤, 한 시간이 넘는 상담이 있었다.
경계성급 장애를 앓는, 그리고 21일 일정에도 다녀간.
차라리 장애등급이 있는 경우라면 사람들로부터 훨씬 더한 배려가 있기도 한다.
아이들만 해도 아예 장애인으로 분류되면 외려 그를 헤아리지만,
멀쩡히 비장애우로 보이는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나오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경계성급 아이들은,
이제 됐겠지, 할 수 있겠지, 알겠지, 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가기 일쑤.
평생 곁에서 돌보고 가르쳐야 한다.
부모 아니라도 누군가 해야 한다.
그게 학령기 아동이면 또 제도권 안에서 해결을 한다지만
성인이 된 이후는 순전히 가족의 몫이 된다.
지치지 않고 하는 수밖에.
그걸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이들이 포진해서 그를 도울밖에.
물꼬가 그런 한 자리일 수 있어 고마운.
테러방지법.
하기야 국정원에서 그동안 안했던 것도 아니고 다만 그걸 합법화하겠다는 것인데,
단순 시위와 집회, 정부비판도 테러나 테러선동이 될 수 있고
(막걸리국보법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테러라는 명분으로 대국민 금융정보 접근이나 영장 없는 감청이 가능한 법위의 법이고,
견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대테러 인권보호관이 달랑 1명 있는 견제 같지 않은 견제.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 위해 47년 만에 재등장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은
9일 만에 막을 내렸고, 결국 통과되었다.
이제 국회를 통과한 합법적 법을 폐기할 수 있는 적법한 절차는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 선고해주는 것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이들과 의견을 나눈다.
이럴 때마다 꼭 따라오는 말들,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그래도 무언가 해야지,
적어도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어?” 그렇게 툴툴거리고만 있는다면
정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전 삶을 저항적으로 살 수 없을지라도
순간순간 더 중요해 보이는 가치에 집중하고,
그렇게 각자가 삶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찾다보면
보다 나은 세상에 서 있지 않겠는지.
그런 작은 신념이라도 없으면
이 세계를, 이 시대를 어찌 견디며 숨 쉴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일은 2016학년도 봄학기 여는 날, ‘첫걸음 예(禮)’가 낮 10시에 있다.
(아, ‘첫걸음 예(禮)’는 진주방언으로 “첫걸음예”에서 온. “첫걸음이라예.” 그 말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