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광고간판 하나 보였다.
'본래 사랑곶'
사랑곶을 안다.
거기 사랑곶의 본래 모습을 그려놨다는 의미거나,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을 곶이라 하니
사랑이란 말에다가 곶을 붙였거나.
그런데 거리가 가깝자 ‘분재 사랑곶’이었다.
아, 어줍잖게 아는 것이 얼마나 오독을 많이 부르더냐.
내 사랑곶을 몰랐다면 사랑곶의 이름자를 보려고 애썼을 것을,
안다고 사랑곶 안에 갇혀 그걸 그 글자로 읽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이해가 이러할까.
그러나 얼마나 다행하냐
사랑곶은 사랑곶으로 읽었더라.
벗이 있다.
나한테 좋은 것 주거나 다 주거나 많이 주는 친구.
누군들 그런 벗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 그런 마음이 든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두어 해 그런 그를 보며 배웠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이다.
배웠으면 다른 누군가에겐 먼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더라.
상대가 내게 셈하고 주춤거리면 그에게로 가는 마음 또한 그 같기 쉬우니.
‘본전 생각난다’ 그런 표현이 되는 게지.
이런 걸 ‘상대적’이라고 할 게다.
그렇더라도 먼저 사랑하기, 그거 좀 해보자,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었으면,
아이들한테가 아니라도.
또 그대의 연애에 부쳐-
괜찮은 사람이던 내가 그를 만나며 안 괜찮다고 자꾸 생각 되면
그냥 고만 만나거라.
그 앞에 서서 자꾸 작아지는 나(이거야 연애의 일반론이겠거니), 그런 게 아니라
서로를 고무시키지 못한다면, 갉는다면, 그만해라.
그런데 고무시키지 못하는 원인은 알고 가야지.
그 정도는 그간의 정리를 봐서라도.
그것이 불성실한, 혹은 신뢰를 주지 못한, 더 사랑하지 못한 나 때문이라면
그만 만나기전 성실하기, 신뢰주기, 더 사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