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휘영청, 가끔 구름에 가리기도.
밤에도 아침에도 비 내렸고, 갠 오후였다.
주말 빈들모임을 위해 몇 가지 장을 보았고,
들어오는 길 늦도록 열린 화원에서 꽃모종들을 좀 사들였다.
마음 붙일 곳을 찾을 때도 사람들은 꽃을 산다 싶은.
건조한 날들에도 삶은 계속된다.
날마다 아침수행을 하고,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밭을 매고 바깥수업을 하고 상담을 하고 답메일을 쓰고,
그러는 사이 마음에도 조금씩 물기가 생긴다.
오늘은 <생활의 발견>을 잠시 뽑아들었다.
옛날 어느 왕조가 몰락했을 때,
한 돈 많은 관리가 궁정이 요리사로 일하다 도망 나온 여인을 고용하고,
그게 자랑스러워 친구들을 초청하여 여인의 요리를 맛보아 달라 했다지.
그런데 여인의 말, 자신은 요리 같은 건 못 한다고.
“그럼 무얼 했었지?”
만두 만드는 일을 거들었단다.
“그럼 만두를 만들어라.”
“아뇨, 전 만두를 만드는 게 아니라 폐하의 만두 속에 넣을 양파 다지는 일을 했어요.”
이 같은 경우가
오늘날 인간 지식의 영역이나 아카데믹한 학문 분야에도 있다는 임어당의 얘기였다.
얼마 전 책을 덮은 <사피엔스>의 한 구절,
p.83 당신의 아주 좁은 전문영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할 테지만,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다른 방대한 영역에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에 맹목적으로 의존한다. 이들 전문가 역시 그들의 영역에 지식이 한정되어 있다. 인간 공동체의 지식은 고대 인간 무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개인 수준에서 보자면, 고대 수렵채집인은 역사상 가장 아는 것이 많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지난해 섬모임에서 읽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도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를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문가의 관리가 아니라 대중의 결단과 정치 행동이 필요한 때’
‘전문가의 지시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는 사라’졌다며
우리 사회의 대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전문가가 끼워 넣는 필요에 부딪힐 때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부정하는 능력에 달려있다던가.
‘전인(全人)’에 대해 또 생각지 않겠는가.
그건 지(知)ㆍ정(情)ㆍ의(意)를 모두 갖춘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나 ‘전방위적’이라기보다
‘균형 있는’의 뜻이 아니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