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27.물날. 비

조회 수 727 추천 수 0 2016.05.11 11:30:48


아침저녁으로 젖은 날.

아침수행을 끝내고 빗속에 꽃모종을 심다,

옳다구나 땅이 젖었네 하고.

호미와 모종삽 잠깐 쥐었는데, 머리와 등이 다 젖어버렸네.

저녁에도 달골 올라 데크 청소.

베란다나 데크 청소는 비올 때가 맞춤이라.

현관 쪽 데크 솔질 박박.

그런데, 방수인 줄 알았던 비닐 재질 점퍼가 그런 기능이 아니었네.

흠뻑 젖어버린.

하지만 뜨거운 물로 씻는 즐거움!

산골 삶은 별 게 다 귀하고 고맙다.

그래서 이 소박한 살이가 좋다. 다 고마우니.

고독도 좋다. 누구라도 반가우니.


젖은 운동장으로 체육활동을 하는 바깥수업이 없었다.

덕분에 잘 쉬다.

아이들을 만나고 어른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게 홀로 있는 시간도 또한 즐거우니.

덕분에 또한 책장 앞에서도 서성였다.

시집 하나 잡고 낱말 하나에 오래 머물다.

어떤 단어는 그 단어가 갖는 고유의 의미를 넘어

사람이고 떠나간 무엇이고 상징이고 비유이고...

그러다 그건 우주의 모든 것이 집약된 낱말이 되기도.



YOL


덧없다고 말하네 저 바람이

늙은 부랑자의 웅크린 겨울 꿈자리 한구석 어디

두고 온 어린 날의 추억

어머니 앞치맛자락 냄새에 잠이 깨던 그 새벽,

그런 새벽은

결국, 아득히 흘러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저 바람과 눈보라의 길이 말하네 이제

차갑게 이마에 와 닿는 시골 버스의 유리창이 말하네

이 끝없는 길 위에 찍힐 점 하나로도 남지 못한다고 덜컹거리네


세상은 변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네

아이들은 자라

수염자리 거뭇한 낯선 얼굴이 되고

훤칠하던 어른들은 하나둘 떠나갔다네


저 눈보라 죽음의 길 십년 백년을

걷고 또 걸어, 우스워라, 다시 제자리

감옥과 무덤과 증오의 길

아아아아 게 누구 없소! 거기 누구 없소! 소리쳐 봐도 있은들 무엇이겠나

절망으로 칠갑한 너와 같은 자

눈썹에 수염에 혹한의 고드름 달고 제 부모 처자 눈 속에 까마귀밥으로 장사지낸 자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육신 하나 지고 갈 곳도 머물 곳도 땅 위에는 없는 자


바랜 흑백사진 속의 풍경과도 같이

저 끝없는 눈보라의 시간이 묵묵히 말하네

모든 길은 죽음 속에 갇혔노라고

말하네, 지상의 길은 사라졌으니

갈 테면 새가 되어 날아가라고


* YOL(길)은 터키의 일마즈 귀니(Yilmaz Guney) 감독이 1982년에 만든 영화이다.


; <가만히 좋아하는>(김사인/창비/2006)에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sort 조회 수
4334 2016. 5.17.불날. 맑음 옥영경 2016-06-01 794
4333 2016. 5.16.달날. 갬 옥영경 2016-06-01 758
4332 2016. 5.15.해날. 밤 10시 5분 전 후두둑 옥영경 2016-05-26 882
4331 2016. 5.14.흙날. 맑음 옥영경 2016-05-26 826
4330 2016. 5.13.쇠날. 구름 걷어낸 오후 옥영경 2016-05-26 776
4329 2016. 5.12.나무날. 쏟아지는 별 옥영경 2016-05-26 816
4328 2016. 5.11.물날. 갬 옥영경 2016-05-26 716
4327 2016. 5.10.불날. 비 / 안식년(安息年)은 웁살라 대신 달골 ‘아침뜨樂’에서 옥영경 2016-05-26 901
4326 2016. 5. 9.달날. 흐리다 빗방울 둘 옥영경 2016-05-18 788
4325 2016. 5. 8.해날. 맑음 옥영경 2016-05-18 773
4324 2016. 5. 7.흙날. 가끔 구름 옥영경 2016-05-18 778
4323 2016. 5. 6.쇠날. 맑음 옥영경 2016-05-18 786
4322 2016. 5. 5.나무날. 맑음, 입하 / 애틋함이여! 옥영경 2016-05-13 887
4321 2016. 5. 4.물날. 갠 아침 옥영경 2016-05-13 757
4320 2016. 5. 3.불날. 어제부터 태풍 같은 비바람 옥영경 2016-05-13 752
4319 2016. 5. 2.달날. 오후 흐려가다 거친 비바람 옥영경 2016-05-13 744
4318 생태교육지도 예비교사연수 30시간(4.30~5.1) 갈무리글 옥영경 2016-05-11 901
4317 [고침] ] 2016. 5. 1.해날. 맑음 / 생태교육지도 예비교사연수 30시간 이튿날 옥영경 2016-05-11 710
4316 2016. 4.30.흙날. 구름 가끔, 바람과 함께 / 생태교육지도 예비교사연수 30시간 첫날 옥영경 2016-05-11 748
4315 2016. 4.29.쇠날. 맑음 옥영경 2016-05-11 692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