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젖은 날.
아침수행을 끝내고 빗속에 꽃모종을 심다,
옳다구나 땅이 젖었네 하고.
호미와 모종삽 잠깐 쥐었는데, 머리와 등이 다 젖어버렸네.
저녁에도 달골 올라 데크 청소.
베란다나 데크 청소는 비올 때가 맞춤이라.
현관 쪽 데크 솔질 박박.
그런데, 방수인 줄 알았던 비닐 재질 점퍼가 그런 기능이 아니었네.
흠뻑 젖어버린.
하지만 뜨거운 물로 씻는 즐거움!
산골 삶은 별 게 다 귀하고 고맙다.
그래서 이 소박한 살이가 좋다. 다 고마우니.
고독도 좋다. 누구라도 반가우니.
젖은 운동장으로 체육활동을 하는 바깥수업이 없었다.
덕분에 잘 쉬다.
아이들을 만나고 어른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게 홀로 있는 시간도 또한 즐거우니.
덕분에 또한 책장 앞에서도 서성였다.
시집 하나 잡고 낱말 하나에 오래 머물다.
어떤 단어는 그 단어가 갖는 고유의 의미를 넘어
사람이고 떠나간 무엇이고 상징이고 비유이고...
그러다 그건 우주의 모든 것이 집약된 낱말이 되기도.
YOL
덧없다고 말하네 저 바람이
늙은 부랑자의 웅크린 겨울 꿈자리 한구석 어디
두고 온 어린 날의 추억
어머니 앞치맛자락 냄새에 잠이 깨던 그 새벽,
그런 새벽은
결국, 아득히 흘러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저 바람과 눈보라의 길이 말하네 이제
차갑게 이마에 와 닿는 시골 버스의 유리창이 말하네
이 끝없는 길 위에 찍힐 점 하나로도 남지 못한다고 덜컹거리네
세상은 변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네
아이들은 자라
수염자리 거뭇한 낯선 얼굴이 되고
훤칠하던 어른들은 하나둘 떠나갔다네
저 눈보라 죽음의 길 십년 백년을
걷고 또 걸어, 우스워라, 다시 제자리
감옥과 무덤과 증오의 길
아아아아 게 누구 없소! 거기 누구 없소! 소리쳐 봐도 있은들 무엇이겠나
절망으로 칠갑한 너와 같은 자
눈썹에 수염에 혹한의 고드름 달고 제 부모 처자 눈 속에 까마귀밥으로 장사지낸 자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육신 하나 지고 갈 곳도 머물 곳도 땅 위에는 없는 자
바랜 흑백사진 속의 풍경과도 같이
저 끝없는 눈보라의 시간이 묵묵히 말하네
모든 길은 죽음 속에 갇혔노라고
말하네, 지상의 길은 사라졌으니
갈 테면 새가 되어 날아가라고
* YOL(길)은 터키의 일마즈 귀니(Yilmaz Guney) 감독이 1982년에 만든 영화이다.
; <가만히 좋아하는>(김사인/창비/200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