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비 다녀간 아침,

하기야 우리 늦도록 깨어있었으니 들킨비라 해야 맞을,

우리 모두 시를 쓴 밤이었다. 누구나 시인이었나니.

어제 저녁 밥상에 쉰 가까이 앉았고

오늘 아침 밥상이 서른이 넘었네.


창환샘(물꼬는 여럿의 창환이 있다. 애도 있고 어른들도 있고.)이 커피를 내리다,

가방에 꾸려온 짐을 부려.

“진짜 엊그제 (물꼬를) 알게 되신 거예요?”

사람들이 창환샘께 물었다. 그렇다.

창환샘이 김기덕 감독을 찾다가 물꼬까지 그 꼬리가 이어진.

그 꼬리의 맨 앞은 김 감독님의 영화 둘에 평을 썼던 오래전 어느 때.

김 감독님 소식(아! 잘 모름)을 아주 가끔 물어오는 이들이 있다.

수행 명상에 관심 있다셨고

마침 물꼬가 일상에서 그러고자 하는 곳이란 말씀 들으시고는.

시 잔치에 커피를 직접 볶아 내려주겠노라 오신 것.

가기 어려운 게 떠나는 걸음이고 오기 또한 그럴 수 있으나

쉬 만나고 쉬 떠나기도 하는 게 사람의 일이라.


어제 시간에 쫓겨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판소리 한 대목,

부엌에서 밥하며 불렀더라네.

무슨 일인 걸까, 저건 뭐지, 동글동글 쳐다보는 꼬마 아이들이 관객이었을세.

가끔 계속 글 아니 쓰는가 묻는 이들이 있다.

이곳에서 사는 게 시이고 사는 게 소설이라.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게 공연이라.

(참, 혼자 고수노릇도 하며 하던 소리를

앞으로 국악박물관의 이행구 관장님 고수로 동행키로 하였네.

어제는 아무래도 판소리 공연 어렵다 하여 건너오지 않으셨던.

지난주 초에 한 번 소리도 맞춰보았더랬다.)


“애들이 고기 사달라네.”

물꼬에서 고기 얻어먹긴 진즉에 글렀으니.

(자주 보니 이물이 없어지고 꽤 차가 있는 선배여도 격이 없으니 곧잘들 따라

연규샘이며들이 교무실에 모여 일할라치면 꼭 금룡샘한테 전화를 넣고는 한다.)

금룡샘과 줄리아가 품앗이샘들을 데려나가 고기며 과일이며 아이스크림,

달걀이며 부엌살림까지 두루 살펴주다.

뒤란 가마솥 앞 전나무 그늘 아래서 고기를 굽고,

식은 밥이 담긴 솥단지도 들고나가 그렇게들 뚝딱 점심 한 끼.

또 큰 식구들 거둬 멕일 밥바라지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으리.


“인제 좀 가.”

등 떠밀 적

정호샘과 금룡샘은 남은 이들이 힘겨울까 쫓아다니며

현수막도 걷어주고 이것저것 큰 물건들을 정리해주었다.

“저건? 또 뭐?”

사람들 가기 전 걷을 것 들일 것 챙기란다.

점주샘과 저온샘도 마지막까지 남은 부엌일이 더 없나 돌아봐주고 떠났네.

그런 눈길 손길들이 물꼬를 밀고가나니.


상찬샘, 떠나기 전 컴퓨터 앞에 좀 앉으라 부르셨다.

텐트와 등산백 하나 장만해준다시더니

우와, 지팡이며 모자며 코펠이며 버너며 심지어 사철 옷들까지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보라시는데...

물건 하나 고른다 해도 시간 여를 찾아야 하는 일이고 보면

그리 챙기시기가 여간한 일이 아니었을 걸.

여러 해 전 천산산맥을 향해 떠났을 땐 등산백이며 당신 댁의 것들을 빌렸고,

두어 해 전 안나푸르나를 오를 땐

허리백과 평생 쳐다도 보기 어려울 전문 산악인 등산화를 사주셨는데,

얼마 전 함께 비박을 다녀온 뒤

이제 정말(여태 말만) 민주지산지기 되겠다는 선언을 듣고는 챙겨주시는 선물들이다.

나이 스물에 같은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있었고,

오래 역사모임을 같이 꾸리고,

긴 세월 지나 댁의 아이들이 물꼬의 아이이기도 했던,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진현이와 관우,

선배이고 벗이고 학부모이고 논두렁인 당신이다.

꼭 나 아니어도 늘 그리 사람들을 챙기고 사시는.

부자라 한들 그게 쉬울까.

그 마음씀을 배우고 또 배우나니.

또한 그것은 '내'게이기 이전 물꼬에 주는,

민주지산에서 이루어질 일정들에 보내는 응원.

"잘 준비하겠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감자 몇 알을 캤다.

이 산마을은 감자가 익어가는 시절.

내친김에 부엌도 정리하자 둘러보니

밥바라지로 점주샘과 유설샘을 중심으로,

설거지에 세순샘이며 줄리아며들 붙고 나니

어찌나들 야물고 마음을 다 냈던지 손이 갈 게 별 없는.

(음... 줄리아를 브라질에 안 보내고 잡을 분 아니 계시나?

그런 괜찮은 처자를 본 적이 없네!)

하여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한 잔치였고, 마음 좋은 빈들모임이었으니!

지난 5년 여 물꼬 한해살이 가운데 봄학기엔 시 잔치가 제일 큰 행사이고 있었다.

그것 지나 여름 일정에 닿으면 꼭 한 해의 절반이 차는.

시 한 줄 읽고 쓰고 듣는 시간쯤 우리 생에 있으면 좋으리,

그걸 사랑하는 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으리,

그렇게 서로 달려와 마주하면 좋으리,

그리 모였던 자리, 누구보다 ‘우리 이생진 선생님’과 함께!

모다 애썼다. 고맙다. 한 고개를 넘어간다.

그리우리, 이 순간들, 이 사람들.


그리고,

이생진 선생님 다녀가시면 시가 더욱 가깝고는 한다...



두리번거리다


1.

마당의 나무상자 모서리에 작아진 옷을 벗어두고 뱀이 떠났다

나 여기 살았었노라, 그대가 보지 못할 때도

제 손으로 벗을 수 없던 옷은 모서리에 걸려 선언처럼 나부꼈다

그대가 알아채지 못할 때도 나 여기 있었노라


2.

내 생은 손을 가져보지 못한 세월

사는 일은 허물이 쌓이는 일

허물은 깊어

모든 부끄러움은 성긴 그물을 촘촘걸음으로 직조하고

몸은 고집처럼 굳었다

고리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꽤 먼 곳까지도 갔을 것이다

그러다 상자 모서리를 봤지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라도 했을 모서리에 옷자락 끝을 걸었다

단번에 해야 해

하지만 모든 문 앞에 망설이던 걸음처럼 겁이 났고

서툰 몸짓에 살은 긁혀 짓물이 나기 시작하는 밤

앗!

살점 하나에 걸려 여태 벗고 있던 옷이 찢어지기도 했다

껍질을 벗는 것조차 예쁘게 하려는 죽일 놈의 허영이여

내 허물은 지각보다 두껍고 단단하고 무거웠다


3.

밤, 기어기어 모서리를 찾는다

거기 내 허물을 벗고 깃발처럼 선언처럼 걸어둘

허물(*1)은 허물(*2)이어 벗는 것


* 허물 1

【명사】

1. 살갗에서 일어나는 꺼풀.

¶ ∼이 벗겨지다.

2. 뱀·매미 따위가 벗는 껍질.


* 허물 2

【명사】【~하다|타동사】

1. 그릇된 실수. 건과(愆過). 과실. 소실(所失).

¶ ∼을 들추어내다.

2. 흉2.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4376 2016. 7. 3~4. 해~달날. 창대비 옥영경 2016-07-21 706
4375 2016. 7. 1~2.쇠~흙날. 비 내리다 개다 다시 내리고 옥영경 2016-07-21 750
4374 2016. 6.30.나무날. 흐림 / 나랑 사는 이 옥영경 2016-07-21 722
4373 2016. 6.29.물날. 흐림 옥영경 2016-07-21 686
4372 2016. 6.28.불날. 아침 절부터 흐려가는 옥영경 2016-07-21 719
4371 2016. 6.27.달날. 맑음 옥영경 2016-07-21 677
4370 2016. 6.25~26.흙~해날. 맑음 옥영경 2016-07-16 729
4369 2016. 6.24.쇠날. 창대비 옥영경 2016-07-16 693
4368 2016. 6.23.나무날. 흐림 옥영경 2016-07-16 663
4367 2016. 6.22.물날. 흐림 옥영경 2016-07-16 658
4366 2016. 6.21.불날. 흐림, 하지 옥영경 2016-07-16 649
4365 2016. 6.20.달날. 흐리다 비 옥영경 2016-07-16 666
» 6월 빈들 닫는 날, 2016. 6.19.해날. 맑음 옥영경 2016-07-13 714
4363 6월 빈들 이튿날, 2016. 6.18.흙날. 맑음 / ‘詩원하게 젖다’ 옥영경 2016-07-13 860
4362 6월 빈들 여는 날, 2016. 6.17.쇠날. 맑음 옥영경 2016-07-13 746
4361 2016. 6.16.나무날. 갬 옥영경 2016-07-13 678
4360 2016. 6.15.물날. 흐리다 비. “비다!” 옥영경 2016-07-09 704
4359 2016. 6.14.불날. 흐림 옥영경 2016-07-09 666
4358 2016. 6.13.달날. 가끔 구름 옥영경 2016-07-09 694
4357 2016. 6.12.해날. 흐림 / 달골 작은 굴삭기 작업, 또! 옥영경 2016-07-09 819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