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억수비는 멎었으나 먼 곳에선 비 아직 험하나 보다.

산 너머 번개 여럿 다녀간다.


시금치를 잔뜩 데쳤다.

비 많으니 겉잎이 쉬 물러지고 있어 둑 채 다 캐온 시금치이다.

아삭이고추도 한 바구니 따왔네.

이런 순간이 아, 살고 있다, 그런 경이를 불러다주는 한 때.


한 보육원과 여름 일정들을 협의한다.

그곳 초등 아이들만을 위한 계절학교를 꾸려 달라 부탁해오다.

우리 계자로 통합하면 어떤가 논의해 달라 했다.

위탁교육을 오려는 중등 아이들에 대해서도 청소년 계자에 함께해보자고 제안했다.

오랫동안 그곳의 교사들을 위한 연수도 의뢰해왔는데,

고단한 교사들에게 그게 더 일이지 않을까 싶어

오히려 물꼬 측에서 그건 좀 생각을 더 해보자 미뤄왔고,

이번 또한 그리 대답을 하였다.

“어른 계자에 두엇의 선생님 정도만 먼저 참가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제 공은 그 쪽으로 넘어갔으니 다음은 이리 넘어오길 기다리면 될 테지.


한 품앗이 샘의 메일,

어린 날 계자에서 만나 청소년기에 새끼일꾼으로 손발 보태고

이제 대학생이 되어 품앗이샘으로 이곳의 교사노릇을 하고 있다.

물꼬가 하는 ‘어른의 학교’로서의 일정들에 때마다 동행하는 그인데,

모임값을 꼬박꼬박 보낸다.

나이 들고 물꼬 가까이 있으면서 그 사정 빤히 보이니 더욱 그럴 것.

그런데, 여기까지 오느라고 만든 시간도 시간이고

때마다 그 값을 챙기려면 쉽지 않을 것 같아

일일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하였더니(다들 형편대로 내니) 그에게서 온 글월이 이러하였다.


... 몇 년 동안 논두렁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근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매달 용돈도 빠듯하게 쓰는 편인데 매달 내고 빈들 같은 것도 그때그때 또 내면 부담일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게 조금씩 매달 후원하는 것도 좋지만,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워지면 그건 정말 안하느니만 못한 것 같아서 일정 있을 때 앞, 뒤로 조금씩 모아서 그때 딱 낼 거 내는 게 낫겠다 싶었거든요. 그래서 빈들모임이나 섬모임 때 내는 돈 생각해서 용돈 잘 운영하고 있고 전혀 부담가진 적 없어요. (그리고 빈들값이 많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빈손으로 자주 들르는 게 좀 죄송하죠.

이건 제가 물꼬의 재정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옥샘을 어려워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떠한 명분 때문도 아니에요. 전혀 그런 불편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감정, 생각 하나도 없이 하는 일이에요. 비유가 알맞을지 모르겠지만 엄청 건강하고 정성스러운 밥을 사먹을 때 그 값이 하나도 아깝지 은을 것처럼, 오히려 적은 값을 내려할 때 마음이 불편한 것 같은 그런 마음이랄까... 물론 돈으로 모든 걸 교환하고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저도 낼 수 있고, 낼만 하고, 내는 게 좋으니 내는 거에요...^^ 잘 정리가 안 되어서 제 마음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빈들 모임 값은 정해진 값만큼 드리는 게 제가 편하고 좋다는... 그리고 그 마음을 받아 주셨으면 한다는 얘기였어요...^^

나중에 정말 내기 어려울 때, 그때는 꼭 말씀드릴게요. 이번에 장학금도 많이 받았답니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나는 그 나이 때 못했을 헤아림이다.

날마다 나를 가르치는 내 아이들이여,

그리고 내 벗이고 동료이고 동지들인 그대들이여,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앤드류 헤이 감독의 <45 Years>(2015).

느린 화면, 많지 않은 대사, 등장인물 몇 안 되는, 그리고 감정의 결이 깊이 느껴지는,

대체로 선호하는 부류의 영화였다.

아이도 없이 45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은 노부부가 파티를 준비하고 있는데

45년 전의 과거로부터 남편의 첫사랑 소식이 날아들고,

평온하던 이들 부부에게 균열이 일어난다.

사랑과 존경이 담긴 남편의 축사로 기념파티는 정점에 이르고

오래 전 일은 그저 지나간 일로 묻히려는데,

영화는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아내의 얼굴로 끝이 나는.

아,...

“내 생각을 다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는 못해.”

우리가 충분히 소통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바닥에 남는 마음들이 있다.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말, 할 수 없는 말, 그렇게 끝끝내 못하는 말들이 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상대에 대한 저버릴 수 없는 예의, 또는 배려로.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 부부 아니어도 사람의 관계에 대해

길게 생각해보게 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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