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브러지지 않기로 한다.

천천히 달궜던 시간을 식힐 때도 걸음을 더디게 해야 한다.

오래 일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한다.

농사일이 그렇고, 물꼬 일도 또한 그러할지라.

오래 걷는 사람은 서둘러 달리지 않는다.

그저 뚜벅뚜벅 지치지 않고 걷고 또 걷는다.

일상이 없는 삶이 어딨던가.

오늘도 해건지기로 하루를 연다.

몸을 풀고 대배 백배를 하고 명상하고.

우리는 또 오늘을 살 것이다.


새벽에 ‘새벽’을 읽었다.

아침이 왔다.

<수학자의 아침>(김소연/문학과지성사, 2013)을 닫았다.

적막했고, 애틋했고, 그러나 환했다.

162 계자를 끝내고 돌아간 사람들의 흔적에

주인샘이 교무실에 메모를 끼운 시집과 시원하게 입을 반바지를 같이 남겨놓았다.

“빨아서 모르고 돌아가면 딱 좋을 바지이네.”

그리했고, 시까지 얹었더라.

고맙다고만 말하기에 부족한 고마움...

이런 날, 좋은 시집을 읽는 날, 고마움이 쌀쌀한 날의 따뜻한 목욕물처럼 오는 날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무서운 짐승이 걷고 있어요 무서운 짐승을 숨겨주는 무서운 숲이 걷고 있어요 무서운 숲의 포효를 은닉해줄 무서운 새의 비명이 번지고 있어요


그곳에서 해가 느릿느릿 뜨고 있습니다

침엽들이 냉기를 버리고 더 뾰족해져요


비명들은 어떻게 날카로울까요

동그란 비눗방울이 터지기 직전에 나는 어떤 비명을 들었습니다

이 비명이 이 도시를 부식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이 사용한 말들이 실패를 향해 걷습니다

입을 다물 시간도 이미 지나쳐온 것 같아요


숲의 흉터에서는 버섯이 발가락처럼 자라나고 있어요 이 비명과 어딘가 비슷하군요 달이 사라지기 전에 해가 미리 도착합니다 함께할 수 있는 한 악착같이 함께해야 한다는 듯


나무가 뿌리로 걸어와 내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무서운 짐승보다 더 무서워요

무서운 것들은 언제나 발을 먼저 씁니다 발은 무서워요

발은 고단함만 알고 도무지 낙담을 모릅니다


('새벽' 전문)



한 품앗이 선생을 데리고 병원행.

당장 피 철철 흘리는 일 아니면 가기가 쉽지 않은 게 또 병원이더라.

가야지 가야지 하고도, 그러는 사이 통증이 가라앉아 그만 또 잊히거나,

이래저래 오래오래 참아버리고 말기도 하는 일이 또 병원 가는 일이라.

한참을 한국을 떠나 있을 것이라 멀리서 혹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어디 안 좋다는 얘길 들었던 바 있어

데리고 가자고 해둔 예약이었다.

가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래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선물 같은 그런 것.

간 걸음에 금룡샘이 계자를 끝낸 식구들에게 맛난 것과 영화 한 편을 주었다.

수고로운 시간에 대한 위로였다.

이런 날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먼 곳의 약국에서 택배가 왔다.

학부모 한 분이 챙겨준 건강이었다,

파스며 모기향이며 물꼬에서 잘 쓰이는 것도 같이.

누구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뭔가를 챙기는 일이 쉽지 않은 줄 아다마다.

이래서 또 산마을에서 살아가나니.

이런 날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잊지 않은, 잊히지 않은 일은 언젠가 하는 날이 오더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 2016. 8.17.물날. 맑음 / 주인샘의 새벽이 문을 열고 나왔네 옥영경 2016-09-08 774
4415 2016. 8.16.불날. 맑음, 말복 옥영경 2016-09-08 715
4414 2016 여름 어른계자(8.13~15) 갈무리글 옥영경 2016-08-26 1006
4413 2016 여름 어른계자 닫는 날, 2016. 8.15.달날. 갬 옥영경 2016-08-26 719
4412 2016 여름 어른계자 이튿날, 2016. 8.14.해날. 밤 비, 전국 나흘째 폭염특보 옥영경 2016-08-26 762
4411 2016 여름 어른계자 여는 날, 2016. 8.13.흙날. 맑음, 전국 사흘째 폭염특보 옥영경 2016-08-26 838
4410 2016 여름, 162 계자(8.7~12) 갈무리글 옥영경 2016-08-19 1162
4409 162 계자 닫는 날, 2016. 8.12.쇠날. 맑음, 유성우 / 기적 옥영경 2016-08-19 907
4408 162 계자 닷샛날, 2016. 8.11.나무날. 맑음 / 경주 39.4도, 우리는 숲(은주암골)에 있었다 옥영경 2016-08-18 1093
4407 162 계자 나흗날, 2016. 8.10.물날. 폭염이라는데 / 보글보글과 도깨비몰이, 그리고 반딧불이 옥영경 2016-08-17 993
4406 162 계자 사흗날, 2016. 8. 9.불날. 구름 좀 / 보글보글과 구들더께의 날 옥영경 2016-08-16 1021
4405 162 계자 이튿날, 2016. 8. 8.달날. 멀리 천둥, 저녁 소나기 / 내가 받아들여진 경험 옥영경 2016-08-12 1022
4404 162 계자 여는 날, 2016. 8. 7.해날. 소나기 / 아이들은 훌륭하다 옥영경 2016-08-10 1086
4403 2016. 8. 6.흙날. 불볕 / 162 계자 미리모임 옥영경 2016-08-10 870
4402 2016. 8. 5.쇠날. 맑음, 한반도 불판 옥영경 2016-08-10 807
4401 2016. 8. 4.나무날. 뫼르소의 태양 옥영경 2016-08-10 667
4400 2016. 8. 3.물날. 소나기 이름 무색한 잠깐의 비 옥영경 2016-08-10 725
4399 2016. 8. 2.불날. 오후 낮은 소나기 옥영경 2016-08-10 752
4398 2016. 7.30~8.1.흙~달날. 흐리고 무덥고 그리고 바람 한줄기처럼 지난 소나기 옥영경 2016-08-10 846
4397 2016. 7.29.쇠날. 얇은 조각 소나기 옥영경 2016-08-10 710
XE Login

OpenID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