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학교로 간 아이가 카이스트에 첫 수시 원서를 쓰다.

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시집보내는 딸처럼, 또 다음 길을 가는 길모퉁이.

아이들이 초등 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중학교를 갈 때도 고등학교를 갈 때도 그렇더니

이 아이의 대학 문 앞에서도 주마등이라.

주마등(走馬燈), 달리는 말의 등이라.

등(燈) 한가운데에 가는 대오리를 세우고 대 끝에 두꺼운 종이로 만든 바퀴를 붙인 뒤

종이로 만든 네 개의 말 형상을 달아서

촛불로 데워진 공기의 힘으로 종이 바퀴를 돌린다지.

돌아가기 시작하는 말은 달리는 것으로 보이리.

그리하여 무엇이 언뜻언뜻 빨리 지나감을 비유하기에 이르렀으리.


물꼬가 가회동으로 이사를 했던 날, 1999년이 저물던 무렵이던가,

열 정도의 샘들은 중국집에서 배달을 시켜 밥을 먹었다.

돌을 넘긴지 오래지 않은 아이도 그날

짬봉 앞에서 면을 먹다 손을 푹 담가 놀았네.

말리지 않고 외려 충분히 놀으라 팔을 걷어주었더랬다.

집은 아직 가회동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이문동에 있었던 그때

냉면발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즐거움에 점심을 늦게 먹었던 날도 있었네.

그렇게 때로 밀가루를 가지고도 천지로 날리며 놀았고,

부엌 세간들은 얼마나 좋은 놀잇감이던지.

혼자 걷기 시작하면서는 곳간으로 가 토들러(두유)를 세 차례나 꺼내다

입안 가득 넣고 조금씩 먹던 그 볼,

집만 나가면 주머니에 돌이며 낙엽이며 엄마 선물로 집어넣고 오던 두세 살 이문동 시절,

처음 천 원짜리를 들고 집 앞 가게에 심부름을 가던 날 뒤에서 지켜보던 그 아이의 세 살,

네 살부터 여섯 살까지 일곱 개 나라를 엄마랑 둘이서 떠돌고 다니던 시간들,

불도 없고 물도 나오지 않는, 야외 샤워를 하던 호주의 산 속에서고

도둑들이 기승을 부리는 유럽의 중앙역들에서도 그를 기대고 살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세월이 있지 않으면 다 커버리고 곱지도 않은 우리 아이들의 날을

우리가 어찌 좋은 눈으로만 볼 수 있겠는지, 하하.

멀리 있는 아비 대신 엄마를 지키며

엄마 생의 가장 힘든 몇 해를 아침저녁 안마하고 산골 삶을 돕던 초등 저학년 나이,

혼자 읍내 나가 제 돈으로 문제집을 한아름 사다 풀던 초등 4년인가의 나이,

세 학기를 유기농장에 한주 한 차례 가서 머슴을 살던 초등 고학년,

드디어 지독하게 갈등했던 사춘기의 절정 8학년,

그리고 제도학교를 가기로 결정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날들,

드디어 고등학교를 갔다!

공부의 누적량이 생기면서 뒤에서부터 차곡차곡 성적을 올려가더니

전교 1등을 하고 전국 모의고사 1%, 0.6%, ...

그리고 어제,

생기부(생활기록부)와 자소서(자기소개서)를 들고 왔다.

그가 보낸 2년 반의 제도학교 시간에 박수, 박수를 보내나니.

뇌과학을 공부하겠다 했고,

카이스트와 서울대와 의대 몇 곳에 수시원서를 넣는다.

원하는 대학에 붙는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원서를 넣을 수 있게 된 것만도 큰 성과라.

공부는 성실의 문제이고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뭘 하건 도움일 거라며 공부했다.

물꼬 일은 해도 해도 표도 안 나는데 공부는 하면 표가 난다 했다. 그랬을 테지.

하다 보니 재밌고, 재밌으니 하고, 하니 잘하고, 잘하니 재밌고, 재밌으니 성적이 오르고...

내가 겨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쉬운) 시험 보려고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나,

수능 날 답안지를 내며 그리 허탈할 만큼 남은 시간 공부를 하겠단다.

건승하라.

거기 기도를 보태나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고3들 또한 건승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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