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 5.물날. 비

조회 수 720 추천 수 0 2016.10.10 09:20:49


두 달 동안 할 치료수업 하나 시작했다.

한 학기만 만나기로 했던 아이를 다음 학기에 다음 학기에, 그러는 동안 고3이 되었고,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별 없다고 정리한 수업이었는데,

아이의 안정을 도와 달라 다시 연락해왔다.

이번 학기에는 책을 중심으로 만날까 한다.

전체 맥락을 살펴주고 좋은 문장을 나누고.


아이가 왔다. 누구라도 기쁠. 아직 태어나지는 않은.

서른여덟 산모이다.

지난가을 다녀갔다; 어른의 학교일지라.

결혼을 앞두고 부부가 와서 서로를 잘 털고 갔다.

하네 마네 하던 결혼이더니 결국 했고 아이까지 그렇게 왔다는 소식.

물꼬가 부려놓은 마음자리일 수 있어 또 고마운지라.


간밤 자정부터 시작된 줄비는 오늘 정오에야 조금씩 갠 하늘로 바뀌었다.

캄캄한,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어릴 때 겁이 많았다.

겁 많은 걸 부끄러이 여기면 그리 위로해주는 어른 한 분 계셨다,

그건 네가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 거야.

하지만 새로운 것들을 창의적으로 내어놓는 그런 상상력이기보다

허무맹랑한 공상에 가까웠으니.

온갖 괴물과 귀신과 도깨비가 같이 살았다.

어릴 적처럼 겁이 들만큼 비가 거센 밤이었다.

마치 세상이 끝나고 다음 세상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여겨지는.

우울도 물방울의 장력처럼 사람을 덮었다.

하지만 천날만날 올 수야 있겠는가,

아무렴 슬픔 또한 그러하겠는가.


지난해 가을학기 치유수업을 진행했던 아이의 어머니랑 연락.

이 가을에 긴 상담 하나를 잡아놓았더랬다.

때가 돼 일정을 나누었다.

식구 하나 큰 수술을 한 소식도 전하더라.

위로했다. 때로 진심어린 위로가 정말 위안이 되는 때도 있지 않더뇨.

‘힘드셨겠구나... 그리고 한참을 먹먹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님은 전문직이라 다행하다 그런 위안도.

사는 일이 뭐 좀 다 했다 돌아보면 또 다음 일이 떡 하니 버티고 있고

그렇게 하나씩 치우며 우리 생이 끝날로 가는.

허망하나 달래 길 없는. 그저 열심히 살아볼 밖에.’


한밤 한 선생의 아뜰리에를 갔다.

수시를 지원한 고3 학생들이 자정까지 작업을 한다고 했다.

옆에서 그림 하나 그렸다.

살면서 그토록 열심히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 곁에서 덩달아 그리 되더라.

허니 열심히 살자,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이를 위해서도,

그리하여 좋은 세상을 위해서!


마음에 힘든 일 하나 벗는 작업을 했다.

글월을 썼고,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좀 놓았다.

받거나 받지 않거나 다음은 그의 공이다.

사람은 어떻게든 견딜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때로 자살조차도 역설적으로 살고자 함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누가 제 목숨을 저버리고 싶겠는가.

자살조차도 살고자 한 몸부림일지라.

어떻게든 견디는 방법 하나이리라.


한때는 그 없이 아니 될 것 같아도

그 없이, 그것 없이 얼마든지 살아지는 게 또 사람살이라.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일이 아니라면, 세상이 끝날 것 같애도 살아지는 게 또 삶이라.

어미를 잃고도 자식을 잃고도 밥을 먹고 노래하는 것이 또한 사람이라.

다만 오래 오래 우울은 따라다닐 테지.

오늘 사람 하나 생각했다.

어느 해 그가 새해 선물 대신 세뱃돈 삼아 준 봉투가 있었다.

이제 그 봉투를 열어 물건 하나 들이려 한다.

떠난 친구는 그렇게도 기억되리.

그렇게 또 삶은 계속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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