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에서 유자가 왔다.

해마다 품앗이 선영샘이 보내온다.

약도 치지 않은 한 마지기 밭에서 해마다 겨우 서너 상자 나오는 것을

물꼬에 꼭 보낸다.

물꼬를 잊은 적 없다, 그렇게 해마다 오는 유자이다.


예비교사연수가 있었다.

계자 외에는 공식 일정을 잡지 않는 12월과 1월이다.

그런데, 간절한 요청이 있었고,

그렇다면 가볍게 다녀가면 좋겠다,

하여 승용차 한 대만 움직여 달라 했다.

그리하여 다섯만 오기로.

사실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상황이 열악한 때이니.

물꼬랑 아주 가깝지 않으면 겨울에 이 낡은 사택에서 지내자고 오라하기 쉽지 않기에.

다행히 영지샘 상훈샘 종완샘이 동행한다.

낯선 얼굴들에겐 그들이 이해를 돕게 하리라.

샘들은 다녀가면서 이곳에 필요한 것들을 눈여겨보고 챙겨와 주었다.

그것은 그저 얼마의 값을 넘어 사랑이고 관심이고 배려라.

이번에도 샘들은 선배들이 한대로, 앞서 했던 대로 자신들이 지내며 먹을거리들을,

그리고 물꼬 부엌에 필요한 것들을 물어 실어왔다.

고맙고말고.


0교시와 1교시와 2교시

차를 달여 내고 짧은 ‘물꼬 한바퀴’.

그리고 달골 올라 햇발동 창고동 뒤란 축대에 마른 풀들을 걷어내다.

생명들이 내린 뿌리는 깊었고,

(이게 견주면) 사람 참 아무것도 아니라며 뽑고 또 뽑았더라.

사물을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때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3교시와 4교시.

먼저 다녀간 이들로부터 초대 받은 이들도 10분 특강들을 이어갔다.

누군들 한 생이 쉬울까, 사느라고 욕본다.

체벌 문제에서부터 흡연문제까지 청소년들과 만나는 고민들을 나누고,

교실을 어떻게 조직할까 머리도 맞대고.


물도 전기도 원활하지 않은 이곳 겨울이다.

이런 데 와서까지 하룻밤인데 가벼이 씻기로. 씻는 곳도 겨우 한 곳.

그래도 따뜻한 물을 고마워 한.

시골 외가댁에 온 것처럼 산골 겨울 산골밤이 즐겁기도 하더라는.


밤, 수능을 끝낸 아이와 아비가 광화문 촛불광장에 가서 소식을 전해왔다.

서울 170만, 전국 232만.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정성스럽게 사는 것으로 촛불과 함께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듣는다.

입사시험 과정을 밟고 있는 아들 하나가 마지막 면접 뒤

구체 면접을 두 차례에 걸쳐 보고 있다.

자소서에서부터 에세이까지 같이 머리 맞댔다고 하지만

측면 지원이라고 무에 그리 한 일일까,

장하다, 거기까지 이르러.

팀원들과 갖는 면접만 마지막으로 남았다.

아, 바라옵건대...


벗이 긴긴 문자를 보냈다.

어제 생일을 맞았던 그였다.

그가 쇠는 음력 생일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양력 그날이 생일이라고 들은 적 있어

그저 지나는 결에 보낸 인사.

‘축하 고마워잉! 태어나길 잘했네. 믿고 기댈 친구랑 같이 재밌게 놀기도 하고 이런 행복한 문자도 받고!!

...

지난번에 너무 재밌게 며칠 딱 붙어 지내다 와서는 한동안 수시로 떠오르고 생각나서

막 또 달려가고 싶었더랬다.’

니 생일도 다 됐네 하며 오늘부터 미리 축하한다고.

‘니가 태어나서 세상이, 내 인생이 더 환하고 아름다워졌어. 와줘서 정말 고마워!’

사람이 무엇으로 살던가,

장문이 눈물 나게 행복하게 했네. 긴 문자도 않고, 늘 건조한 그의 문장을 아니.


얼마 전 며칠 나들이에 동행한 큰 어르신 한 분의 문자도 닿았다,

섬에서의 내 사진과 함께.

‘삶을 아는 사람과 동행하기 어려운 일인데,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만나 보람이었어요.’

정녕 사람이 무엇으로 살던가,

내 삶의 애씀을 헤아려주시는 애정과 찬사로 읽었다.

눈 시리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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