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계자를 끝내고 갈무리 글을 남긴 아이들 가운데 하나인 여원이는

<일기>라고 글을 시작했더랬다.

일기, 정겹다 그 낱말.

오늘 나도 그리 쓴다, 일기라고, 산마을 일기라고.



<산마을 일기>


눈이 많겠다던 간밤이더니

예보는 축축해진 흔적으로만 새벽을 짐작케 했다. 비이거나 눈발이었거나.

겨울해가 떠오를 때야 방문을 여는, 동면이 필요한 나이건만

학교아저씨가 설을 쇠러 가서 비운 날이라고

이른 아침부터 몸이 저 먼저 잠을 깼다.

곤줄박이 다섯, 딱새 하나, 굴뚝새 아홉,

(사실 되는대로 비슷함직하게 부를 뿐인. 새 도감을 정말 하나 갖춰야겠다!)

닭 꼭기 4,5,6호(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오래오래 산 늙은 1,2,3호는 엊그제 얼어 죽었다...),

개 장순이와 사과와 만화,

학교 마당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며 같이 사는 식구들을 들여다보았다.


며칠 차가 오갈 일 없으니 큰 대문도 닫고,

소나무와 살구나무 사이를 들어오다 멈춘다.

오렌지콘, 이걸 뭐라 하나, 그 왜 도로 혹은 주차장 들머리의 원뿔 안내판,

그것이 넘어져 있기 여러 날인데,

눈 위에서 여기저기 던져둔 듯 쓰러진 걸 보고만 있었는데,

못으로 땅에 박아두어도 바람에 결국 헐러덩 넘어져버리던 걸,

그렇지, 돌을 뒀다 뭐하냔 말이다.

가까운 곳에 돌탑을 위해 돌들이 널려 있었는 걸.

그걸 가져다 여며놓는다,

왜 이제야 그 생각을 했지 하며.


빨래방으로 간다. 아이 하나가 남겨놓고 갔다는 바지가 있었는데,

아직 확인을 못해주고 있었다.

겨울 빨래는 여러 날 그렇게 널려있기가 쉽고,

계자 끝나자 며칠이나 먼 길을 다녀오기도 하여.

있다. 설 지나 보내주어야겠다.

그런데, 문짝이, 비닐하우스다, 덜렁거린다.

문을 닫으면 문짝이랑은 한몸이지만 그 문틀 전체가 아랫부분에서 흔들린다.

그것도 모르고 처음엔 잘 안 열린다고 문짝을 통째로 흔들다,

아차차, 가만 들여다보니 문은 닫혔는데, 문틀 전체가 꿀렁거린.

아래 양쪽이 반생이(굵은 철사를 그리 부르던데)로 감겨있던 것이 끊어져 떨어져있다.

시간에 장사가 어딨던가.

이러다 바람손이 자주 닿으면 그만 문틀까지 내려앉고 말 것.

보는 순간 움직여야 하는 것이, 하기야 무슨 일이 그렇지 않을까만,

이 산골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일 많은 산골살이에 조금만 놓치면 다른 일에 밀려 더뎌지거나 그만 한동안 잊히거나.

그리하여 더 큰 일이 돼버리기 잦다.

본 순간 해야지!

두리번거리니 비닐하우스에 쓰이는 철사 하나가 굴러다니는 게 보이기 손으로 어찌 해본다.

기둥체와 문짝체를 엮어보지만 자꾸 튕겨나가며 손만 아팠네.

목공실에서 얼른 펜치와 반생이를 챙겨와 곁에 두고,

그래도 앞서 하던 철사가 아쉬워 그걸 먼저 다시 걸어보는데

역시 구부러지지 않고 철사가 가진 원래 형체로 자꾸 되돌아가며 튕겨나간다.

챙겨왔던 장갑도 끼고 했지만 손만 아팠다.

다행하게도 혹시나 하고 펜치와 함께 들고 나온 철사 있어 양쪽을 야물게 고정하였네.

오랜 시간도 아닌 걸.

바람 없고, 손이 아리지도 않았다. 고맙다.


연탄불들을 갈고

나온 연탄재를 패인 마당 한 곳에서 깼다.

새 연탄을 가지러 가다 되살림터 쪽에 보이는 연탄재 대여섯 개도 패인 곳에 깬다.

된장집에서 나온 연탄들도 물기 고인 곳들에 깼다.

쌓여있는 것들도 좀 가져다 더 깬다.

제 때 하지 못하고 몰아둔 것들은 일을 만들고 말더라.

잠시 짬 내면 될 터인데.

불 지킴이 일을 맡은 며칠은

나오는 연탄재도, 또 그간 한켠에 쌓아두었던 것들도 틈틈이 깨자 한다.

어디를 메우면 좋을까 살펴둔다.


그런데, 고추장집과 간장집 보일러실 문들이 채워져 있지 않고 뭔가로 받혀져 있었다.

잠금쇠가 맞지 않는.

지난 초하루 문짝들을 고친 뒤 다른 식구들에게 올려 보내 달게 했는데,

그 부위가 맞춰지지는 않았던가 보다.

말해주지 않고 지나간 이들도, 살펴보지 못한 나도 참...

아, 문짝이 무거워 내려앉았을 수도 있었겠다.

어쨌든 봤을 때 하기!

목공실에서 드릴을 챙겨와 피스를 뽑아내고 다시 박는다.

냉큼 하는 대답처럼 딱 들어간다.

그런데 한 곳은 피스 머리가 뭉개져 뽑아낼 수가 없었다.

드릴을 쓸 때 무리하게 피스를 돌리지 말아야 한다.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끌과 망치로 빼내느라 애먹었다.


짐승들 밥 멕이고 났더니, 해가 졌다!

그나마 날이 푹해 움직이기 좋았다.

산골짝 삶, 정말 겨울에는 마당 두어 번 오가면 해가 진다는 딱 그 말일세.

하나 더 하고픈 일이 있었는데.

평상 곁에 솔라등 하나가 아주 망가졌다.

안의 전등은 살았고, 덮개가 깨진.

달골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등을 여기 끼우면 되겠다 하고 지났는데,

오늘 그 편을 본 순간 앗, “아하, 그러면 되겠구나!” 반짝했다.

한밤에도 하고픈 걸 꾸욱 참고 해 뜨길 기다린다.

여기 살면 많은 일들이 일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라니까.


오늘 마지막 들어온 전화는 홀로 명절을 새는 이의 음성이었다.

하나 있던 피붙이 할머니마저 잃고 설과 추석이면 산에 푹 묻히는 그니이다.

와서 떡국 먹고 송편 먹고 가래도 결코 나오는 일 없는.

그믐밤과 설 사이를 넘어가며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더란다.

고맙다 했다. 뭘? 뭐 하나 한 게 있다고.

그냥 이런 날 전화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그리고 한해 고맙다고. 자잘하게 늘 써주는 마음 아노라 했다.

작은 관심 하나도 그리 크게 받아주는 이가 있어서 고마웠다.

나무 접시 하나 만들려 또 한 번 건너갔다 와야겠네.

얼마 전 찾아온 벗이 접시 하나 탐내더니

늘 고마운 마음 그걸로 답해도 좋으리.

마침 조각도로 만들고 있던 접시도 끝냈는데 거기 가서 칠도 하고.


홀로 학교를 지키는 날이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겨우 한 이틀이나 될까.

평화에 거처했다. 좋으네, 이 고요.

이곳에서 몸을 쓰고 있을 때의 사람답게 사는 것 같은 기쁨도!

그에게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건만 그리운 이에게 쓰는 글월처럼,

받을 곳도 알지 못하는 편지를 쓰듯 이름자 하나도 불렀다.

그리운 이는 숨과 숨 사이에도 스며든다.

그것이 종일 불편한 장이 되었을 테지.

‘그’는 내가 떠나온 어디이기도 하고

내가 보낸 누구이기도 하며

내가 닿지 못하는 어떤 이이기도 하고

내가 가고픈 세상이기도 할.

떠나는 모든 것은 잘 가시라, 안녕!

오는 모든 것은 어서 이리 앉으시라, 안녕!

부디 용서하시라, 내가 알고도 모르고도 휘둘렀을 폭력들, 나를 봐달라는 것조차 그랬을지도.

장앓이도 가라앉았음 좋겠네,

해우소 한 번 다녀오려 해도 옷 다시 다 갖춰입고 문을 열어야는 곳이니.

그믐밤 지나 설로 넘어간다.

설이다. 새해, 영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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