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영하 12도.
아침 댓바람부터 온 아이의 전화.
“운동하고 과외가요.”
욕본다. 곧 대학 입학을 앞두고 이제 집을 떠난 아이는 그렇게 제 삶을 꾸리고 있다.
“웬?”
가르치는 것,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단다.
어머니가 나를 잘 키웠구나고도 생각한다나.
“애들이 공부를 정말 안 해요...”
과외하길 참 잘했다, 엄마를 많이 생각한다는 전언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랑 왜 결혼했는지 알겠다, 요새는, 그런 덕담(?)도.
“그런데, 아이들에게 의욕을 어떻게 키워줄 수 있을까요?”
그건 일반론의 범주가 아니다. 개별적인, 너무나 개별적인.
그를 관찰하고, 알고, 이해하고, 애정해야.
“라포(rapport)형성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
그래야 내 말이 그에게 설득력이 있는.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아주 긴 변명> 시사회.
아내의 지지로 시작해 20여 년 글을 쓰며 유명작가가 된 사치오는
친구와 여행을 떠난 아내를 겨울 눈 덮인 산길에서 버스 전복 사고로 잃는다.
갑작스레 아내를 잃은 남자는
같은 사고로 역시 갑자기 아내를 잃은 트럭운전사 요이치와
엄마를 또한 잃은 요이치네 남매, 그들 가족들 삶으로 들어간다.
여러 날 일을 떠나는 요이치를 대신해 남매를 돌보며(또 하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쯤)
여러 계절을 지난다.
해체된 가족들이 어떻게 재구성되는가에 개인적인 관심도 많고,
여러 영화들도 보았다, 가족이란 게 무엇인가를 묻는.
나만 관심있었던, 하지만 자존감은 바닥이었던 남자에게
새 가족 안에서의 삶은 아내가 사고를 당할 때, 혹은 자신의 삶에 긴 변명이 된 셈.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냄새가 짙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사단이었던 미와였다.
내 인생의 영화 몇에 꼽기에 주저치 않을 고레다의 <아무도 모른다>.
길로 내몰린,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 넷의 생존기록.
담담하게 그려서 처연하게 슬펐던,
절제의 미학이라면 그런 걸 거다.
무거운 주제를 건조하게 푸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훨씬 더 섬세한 결로 그리고 있었다.
감독이 여성과 남성이라는 차이일 수도.
직접 소설을 쓰고 그것을 영화로 만드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일 수도.
<아주 긴->은 감독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인간의 불행이고 한편 다행함은 우리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깊이 배운다는 것.
떠나고서야 소중한 줄 안다. 언제나 후회와 깨달음은 시간적으로 끝에 위치한다.
먼저 오기 어려운. 하지만, 그나마 또 다른 시작일 수 있는 게 위로인!
곁에 있을 때 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리.
절필을 선언해야겠다 생각할 정도로 더는 글이 나아가지 않던 사치오는
이제 다시 글을 쓴다. 그 글의 시작은 ‘인간은 타인이다’라는 문장이었다.
결국 인간은 관계망 안에 있다는 것일 터.
타자를 통해 내가 드러나고 나를 구현하는.
미용사 아내가 죽은 뒤 한 해 동안 자라있던 머리를
아내의 동료, 장례식 날 당신은 아내를 얼마나 이해했느냐 비난하던, 에게 맡기는 사치오,
인간은 타인이다...
100자 안내: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도 보이는 자신의 모습만을 챙기던 철없는 작가가
같은 사고로 아내와 엄마를 잃은 가족들 속에서 자신과 혹은 타인과 화해하고 성장하는,
결코 평면적이지 않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