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쥐어박고도 남을 일이었다.

세상에, 초행인데, 더 서두를 법도 하였으련,

날마다 오르내리는 토굴 주인장이 길이야 외길이라 쉽다한 말만 믿고

한껏 여유를 부린 게 사단이었다.

게다 나가야 할 고속도로 출구를 지나쳐 길을 더 돌게 되면서 시간이 지체되고,

분명히 챙긴 헤드랜턴이 그 어디에도 없어 모든 짐을 다 꺼내 수색을 하느라

밝은 때를 다 놓치고 말았으니.

지난 1월 하순부터 몇 차례나 시도했으나 번번이 걸음을 접어야했던 영월행이었다.

먼 곳에 흩어져 사는 이들 몇이 일정을 맞추려니 어렵기도 했던.

네팔 가기 전 몸을 준비시키는 시간쯤으로 여기고

그예 이번 참에 다녀오자 홀로 나선 길.


제가 멧돼지가 놀랄 만큼 우락부락 생겼습니다,

산에 살아도 산이 그리워요,

야간산행도 거뜬합니다,

그리 큰소리는 쳤지만,

혹 야간산행이어도 별빛 달빛 도와주리니,

하지만, 어허, 어찌 흐린 밤은 몰랐을꼬.

가끔 사람이(나 말이다) 참 무모하다.

산 아래 마을 계곡 들머리에서 시오리 길,

저녁 6시에야 들어섰다.

결국 헤드랜턴은 가마솥방 상 위에 잘 모셔놓았으려니 잊고

그래도 손전화가 있으니 그것에 의지하자 하고.

산으로 올릴 먹을거리들을 잔뜩 챙겨 넣은 커다란 배낭 위로

작은 배낭을 하나 더 졌다.

어느새 땀이 비 오듯, 시야가 흐려져 안경을 아예 벗고.

그 안경을 놓쳐 또 한참 더듬거려 찾기도.

외길이라더니, 이런! 낮이어도 두리번거릴 법한 곳 여럿.

그런데 사람의 흔적은 질기기도 하지,

인기(人氣)가 그리 무서운 게야,

천천히 가만가만 살피면 길이 나타나더라.

어두워 계곡 쪽으로 혹은 산으로 길을 헤매가며도.

들머리에 공사 자재를 하나씩 들고 오라는 주인장 안내문이 있더만,

웬 걸 그것까지 들었더라면...

바위를 넘을 땐 밧줄이 안내를 돕기도 했는데,

줄 길이를 가늠 못해 느슨해진 채 잡고 오르다 그만 미끄러지기도 하였네.

목장갑 낀 손이어 다행이었지, 그래도 멍은 남았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그렇게 비탈길에서도 넘어져 한참 잘 쉬었더랬다.


계곡 초입에서부터 아예 손전화가 안 되는 곳이었다.

어찌어찌 끌어다 유선 전화는 놓았다더라.

하여 오르는 이도 기다리는 이도 소식 모르는.

오르며 이러다 밤을 밖에서 날 수도 있겠구나, 상황을 살폈다,

바위틈으로 들거나 나무를 의지하고 지낼 만한.

그리 마음먹고 나자 “에라, 모르겠다!” 하고 털퍽 주저앉아 한참을 쉬기도.

지난해 1월 삼도봉을 오르던 밤을 생각하였네.

손에 있는 빛이라곤 다 잃고 별빛에 의지해 걷던,

그때 모든 사물들이 일어나 나란히 걸어주던.

하늘은 흐렸고, 밤 산길이 도무지 자신을 보여주지 않을 땐 눈을 감고 온 몸을 열었다.

그러면 모든 감각이 살아나 마침내 길을 찾더라, 찾아내더라.

길이 사라질 때마다 멈춰 서서 그리 반복하였다.

산길 익숙하다지만 방만했노니, 그것도 초행길이었는 걸.

그나마 누군가 산중에 있다는 것이 주는 위로를 불빛 삼아 걸었네.


50분이면 닿는다 하였는데,

시계는 7시를 15분 넘기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오는 불빛.

토굴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아마도.

저녁상을 물리고

두 방 아궁이 가마솥에서 나온 뜨거운 물 넘쳐

좋은 물 있는 김에 눈에 걸리는 부엌부터 좀 치워내고.

그제야 비 내리기 시작하더라.


산골 비 내리는 처마 아래 툇마루에 걸터앉아

노래를 주고받기도 하였네.

노래에 찔레꽃이 얼마나 피고 지었던지.

성악을 전공한다는 여식이 그냥 불쑥 나온 게 아니더만.

자정에야 씻고 들어와 책을 펼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읽을 책은 두고 왔지!”

이 많은 살림을 지게로 져다 날랐더란다, 집도 그리 짓고.

보이면 가벼이 읽지, 언제부터 그러마고 한 책 하나 거기 있기

새벽 5시까지 펼쳐들었더라.


비 멎었으나 바람 거칠었고

기온은 다시 뚜욱 떨어졌다.

아침마다 수행으로 아침을 열고

밥을 짓고 청소를 했다,

뉘 집 냉장고면 어떠리, 늘 그리 사는 물꼬 식으루다.

(물꼬도 그렇지만 산에 사는 이의 고단함이 구석구석에 있었다.)

계곡에서 소리 연습도 했고, 누각에서 명상도 하고,

두어 권의 책도 들여다보았네.

그리고 당장 물꼬에서 올해 해야 할 일들,

새 길을 모색해야 하는 그곳의 일들을 서로 살폈다.

거기 새 단장하고 사람들 모실 적에 오시라 공연 초대도 받았다.

“쑥대머리도 한 대목 해주시고, 춤도...”

한편, 명상정원 ‘아침뜨樂’ 혹은 집짓기에 당신 또한 보탤 손 있잖겠냐고도.


산을 나오며 올랐던 길을 되짚는데, (멧돼지 고기도 얻어 오는데,)

세상에, 이틀 전 그 밤에 그런 길을 걸었더란 말인가.

뭘 모르면 용감한 법.

한 달에 한 번씩은 못 와도 두어 달에 한 번이라도 올 수는 없으시냐,

언제든 드나드시라 산 들머리 울타리 열쇠를 주인장이 내미는데,

전적인 신뢰에 고맙기는 하였으나 되돌려드리다.

“필요할 때마다 주시는 걸로! 넘의 집 열쇠까지 있으면 삶이 너무 무거운께.”


찬사가 이어지는 소설을 댓 편 냈던 작가가 쓴 에세이를 읽고는

더는 그의 소설에 눈 두지 않았는데,

산골 오두막에서 하나 보이기 읽어 내려가니 역시 영상 같은 소설쓰기는 괄목할 만하데.

소설 한 쪽과 평 한 쪽 옮겨 적기.

가까운 이들은 이게 내가 쓴 글인 줄로 알지도, 내 자주도 하는 말이니.


... 그때 살려고 애쓰는 것 말고 무엇이 가능했겠느냐고.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p.345)


더 높이, 더 멀리 날고만 싶었던 ‘고기리 촌닭집’ 출신 기자가 도달한 곳은 사건의 ‘뉴스가치’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절실한 생의 의미’였다. 그녀는 갑과 을의 무한경쟁으로 얼룩져버린 이 참혹한 세상에서 ‘성찰적 지성’의 가치를 일깨우는 존재다. 어떤 스캔들 속에서도, 어떤 정치적 외압 속에서도, 인간 개개인의 진실은 함부로 도륙당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에 선행을 베풀기는 쉽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정말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를 증명하는 것은, 참혹하고 비통한 시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숨 쉬는 인간성’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것이다.(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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