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멀거려 뒤척이기 시작하면 봄이 가까웠다.
겨울이 조금 맥이 풀렸다 싶은 어느 밤 몹시 치는 천둥도
그렇게 멀리 있는 봄을 부르는 소리였다.
저녁답에 비 뿌리기 시작하더니
자정을 넘기며 천둥도 쳤다.
봄이 언 산을 가르고 깨는 소린가 싶더라.
하오엔 달골 올라 화단의 마른 가지들을 쳤고,
햇발동 안의 화분들에 목을 축였다.
‘아침뜨樂’에 다녀간 겨울자리를 둘러보기도.
눈이 녹기 시작한 땅은 퍽 질퍽거렸다.
팻말들이 기울어져있기도 하고,
룽따 휘날리는 아래 기분 좋은 파란색으로 선명하던 ‘달골 명상정원 아침뜨樂’ 현수막도
그만 뚝 끊어져 더는 못 쓰게 되었다.
아마도 그 선명함 때문이었을 게다,
부러진 발목처럼 마음이 그만 접질려지더라.
‘아가미 못’은 가득 차 얼음 얼어있었고,
‘달못’은 올 봄 공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옴’자 머리 부분에 심은 차나무들은
겨울을 났는가 아직 더 기다려봐 얄 듯했으며,
측백나무며 다른 나무들 역시 봄바람 불어봐야 그 처지들을 알겠는.
봄을 기다리는 건 사람만이 아닌 게다.
북한에서 100권짜리 <김일성 전집>을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시절,
한국에서 주사파가 아니어도 그 전집을 한번쯤 읽으려 들던 그런 청년들이 있었다.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 평양 노동정치학교에서 한 연설이
1990년대 간행된 <김일성전집>에 전문으로 실렸다.
앞서 그 연설문을 1980년에 나온 백과사전에서 뜬금없이 등장했다.
해방 후 김일성이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난 건
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평양시 민중대회였다.
한홍구 선생에 따르면, 1949년판 <조선중앙연감>에는 그때의 연설문이
겨우 200자 원고지 두 장 분량 정도만이 남아있는데,
어떻게 앞서의 그 연설문이 전문이 남았을 수가 있냔다.
누가 그 전문을 썼을까, 남아있지도 않은 연설문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얼마나 많은 일이 이러할 것인가.
내가 분명한 근거자료로 삼았던 것들이 겨우 몇 해 전에 만들어진 허구라면?
“부담스러웠다...”
한 남자가 연인 앞에서 말했다.
그 말을 한 남자가 떠났는지, 그 말을 들은 여자가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무엇이 부담스러웠다는 말일까...
살기가 힘들어진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만 관계가 건조해진 까닭일까.
그게 무엇이든 의무나 책임이 무거워지더란 말인 듯은 하다.
언젠가 사랑의 책임이란 게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어떤 이가 물어온 적이 있다.
무어라 답했는지는 되짚어지지 않는다.
어렴풋이,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책임지는 것 아니겠는가 답했던 듯도.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자주 입에 올리지만 결국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겠냐며.
혹 부담이란 결국 사랑이 예전 같지가 않을 때 생기는 마음은 아닐까...
생을 걸 수 있느냐, 스스로에 대한 이 물음이야말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대답 아닐지.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때, 그때 우리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