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덥다.
제주도에서 장마가 시작 되었다.
연어의 날 행사를 끝내자마자 숨 돌릴 겨를 없이 소화해야 할 일들이 이어졌고,
비로소 오늘 느지막히 아침을 열었다.
행사 때 미처 손이 가지 못했던 일들, 그래서 눈에 남았던 자잘한 일들을 살피기도.
“앗!”
피아노 덮개도 빨지 못하고 행사를 맞았댔구나.
비로소 걷어내 빤다.
피아노 위에 놓인 장식품이 또 걸리지.
헝겊으로 만든 장식품들도 먼지를 털고 빨았다.
샘들이 손을 보다 말고 쌓아둔 아침뜨樂 안내 팻말도 있었지.
꺼내와 다시 써야할 곳 쓰고, 고칠 곳 고치고
그리고 달골에 올라가 자리마다 박아주었다.
아래 학교 작은 연못에서 나눠온 물상추와 부레옥잠도 밥못에 더해주고.
뜨樂을 나오다 보니 샘들이 바삐 일하다 두고 온 호미와 낫들, 거두어오다.
아침뜨樂을 걸어 나와 건너편 둘러친 산과 하늘을 본다.
저녁답에 이렇게 서 있는 걸 좋아한다.
혹 분노가 일거나 지친 날이기라도 하면,
달골에서 눈앞으로 펼쳐지는,
마을을 안고 둘러친 허리띠 같은 저녁이 내리는 산그림자에 날선 마음이 그만 누그러진다.
생에 무에 한 게 있다고 이런 호사를 누리는가 싶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생각했다. 뜬금없이? 생각이 비약이거나 글이 지나친 도약이거나.
그 작품엔 색이 없다. 색도 편견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던가. 슬픔에는 색도 편견이다.
세상이 돌고 일이 일어나고,
물리적 거리가 있든 없든 세상은 나와, 내 삶과 무관하지 않게 흐른다.
사람들이 오고 사람들이 간다.
맞이하기 위해 할 일이 있고 보낸 뒤 갈무리가 있다.
하지만 일은 맞이하기 위해 할 일이 갈무리 뒤에 놓이기도 한다.
앞이 앞이어도 되고 뒤가 앞이어도 된다.
다 괜찮다. 왜? 사는 거니까. 내 삶이니까. 나는 나의 삶을 산다, 그뿐이다.
슬픔에만 색이 편견인 게 아니다. 슬픔은 슬픔이고 기쁨은 기쁨이고 색은 색이고
‘그냥’ ‘그런’ 거다. 일종의 담백함이라 해야 하나.
게르니카의 빈 색을 오늘 내 삶의 하루 저녁을 통해 본다.
우리의 실존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책 어느 구석에서였다.
내일은 교장단(이랄 것까지는...) 모임 있어 맞이를 해야 하고,
바로 서울행.
꼭 순방으로 답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연어의 날에 이생진 선생님 다녀가셨다.
달마다 마지막 쇠날에 있는 선생님의 인사동 시낭송회에
내일은 물꼬 식구들도 걸음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