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23.물날. 소나기

조회 수 896 추천 수 0 2017.09.28 11:17:06


처서라지만 모기 입은 아직 건재하다.

절기를 자주 잃는 천지이다.

사람노릇, 사람살이는 무사한가.


주초 사흘은 가을학기에 지을 집짓기 설계모임을 예정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한 자리로 모이는 일이,

그것이 직업적 상황이 아니면 쉽잖다.

그만큼 조율자의 역할이 중할 테다.

결국 하동 길은 그렇게 빈 걸음이 되었다,

남도를 다녀오는 결에 들리기로 한 거긴 하나.


물꼬에서 1994년 첫 계자 이후 처음으로 여름 계자를 쉰 안식년이었고,

그 허전함은 남도의 한 대안학교의 여름 일정을 거들면서 달랬다.

곳곳에서 샘들도 여러 학교에 손을 보태고,

아이들도 저마다 캠프며들을 다녀왔다 했다.

한동안 비운 집은 거미줄과 곰팡이와

공기 속에 사는 존재들이 넓힌 땅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부엌의 커다란 가스렌지 밸드 하나하나에도 번진 꽃들처럼 곰팡이가 앉았다.

솔질 청소에 두어 시간이 훌쩍 흘렀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시간이 물꼬에서의 청소시간이 아닌가 싶은.

밭에는 가지와 고추와 토마토와 오이들이,

그리고 김소장님이 챙겨와 넣어주신 먹을거리들이 냉장고를 채우고 있었다.

산골 부엌에 요긴할 걸 아는 분이시라.

어제부터 달골 아침뜨樂에 올라 못들도 살폈다.

밥못 수위가 미궁으로 넘쳤다.

혹 밥못에서 달못으로 땅 아래 흐르는 관 둘의 어느 문제는 아닌가,

지난 마른 날들에 작은 관이 막힌 듯도 했던,

시스템을 살펴보고 있다.

역시! 들여다보는 것 중요하다마다.

이제 좀 온전한 물 흐름 구조가 만들어진 듯.


시인 서정춘 선생님이 연초에 내신 새 시집을 보내오셨다.

손으로 엮어 하루에 열댓 권 겨우 만들어진다는 시집이었다.

어르신이 한 땀 한 땀, 선생님은 시 한 편에 스물 댓 번은 손을 댄다셨다, 짠 옷을

덥석 걸친 꼴이라.

그 옷이 내 시쓰기도 도울 수 있다면.

집짓기에 중심역할을 할 무산샘이 현장을 살피러 들어왔고,

고스톱 멤버 구성처럼 멤버 구성이 돼야 더 맛난 월남쌈을 냈다.

오랜만에 먹는 물꼬의 여름 음식.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글 한 편을 스친다.

그니는 니체를 통해 결정적으로 공부가 이어졌다 했다.

공기처럼 믿고 자연스럽게 체화한 생각이나 관습, 도덕 규범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통해.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하여 판단한 것이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욕망할 때,

그건 자신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에 의해 주입된 것일 수 있다는.

왜 아니겠는가.

글쓰기에서는 역시 ‘자기 생각’을 역설했다.

우리는 대개 자기 생각을 과감하게 펼치는 데 너무 무능하다고.

써라, 가짜 생각 말고 진짜 생각대로!

개별적인 경험을 구체적으로 쓰면 반드시 보편과도 만난다.

자기만 그런가 싶다가 자신만 그런 게 아님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도 높아진다는.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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