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씨를 놓았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었다.

안식년에도 여전히 흐름은 학기 단위로 흐르고 있고,

공식일정 없어도 변함없이 아이들이, 또 어른들이 오가고,

오갈 것이고,

살아내야 하는 일상도 고스란하다.

괴산에서 집짓기 모임.

게서 목조주택을 짓는 영준샘과 달골에 지을 집 중심축을 맡은 무산샘과 머리 맞대다.

“일단 현장을 보고 얘기 합시다.”

낼모레 물꼬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아이를 앞세우고 집안 어르신을 뵈러 갔다.

사람을 맞기 위해 팔십 외숙모님이 차린 밥상을 받다.

생선조림과 고기구이, 나물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놓인 찬,

정갈했다.

거기에 담긴 세월을 읽었다.

지금도 당신은 성당에서 큰어른 노릇을 해내고 계신다.

외삼촌은 오래 붓글을 쓰셨다.

달골 창고동에 걸린 큰 족자가 당신의 작품이다.

그 속에도 역시 시간이 담겼다.

이번 걸음에, 혹 (족자)못 읽을까 해석한 글을 챙겨두셨다가 내미셨다.

당신들이 산 삶이 당신들의 얼굴에, 손에 쌓였다.

사람의 생은 그렇게 그 사람에게 남는다.

우리들의 하루하루도 그렇게 우리들에게 얹힐 테다.


익숙한 실망감이 느껴졌다. 무엇 하나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우리는 반쯤만 공유된 신뢰할 수 없는 지각의 안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 감각의 데이터는 욕망과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억 또한 왜곡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를 설득한다. 무지비한 객관성, 특히 우리 자신에 관한 무자비한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전략은 언제나 실패하는 운명이었다. 우리는 절반의 진실을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확산을 주기 위해 스스로도 믿어 버리는 사람들의 후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적당한 사람들만 추려졌고 그런 성공이 이어지면서 결함 또한 바큇자국처럼 유전자에 깊이 새겨졌다.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을 경우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합의할 수 없다는 결함 말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가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인 것이다. 이혼과 국경분쟁과 전쟁이 바로 이런 이유로 생기고, 동정녀 마리아 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가네시 신상이 우유를 마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과학이 대담한 사업이고 바퀴의 발명이나 심지어 농업의 발명보다 더 놀라운 발명인 이유도 그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인공물인 것이다. 사심 없는 진리. 하지만 우리 자신을 배제하지는 못했고 습성의 바큇자국은 정녕 깊었다. 객관성에서 어떤 개인적인 구원을 찾을 도리란 없으므로.(p.254)


이언 매큐언의 오래 전 소설 하나를 읽었다.

그의 서술 혹은 사유 방식이 거기에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생각은 우리가 살아온 결.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

쇠귀선생이 일찍이 표현한 문장 그대로.

생의 어느 순간에도 내가 아닌 적이 없다!

그러니 부끄러운 일에도 변명할 것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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