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탑을 켜면

아침안개가 걷히지 않은 서해의 섬 한가운데 솟은 봉우리 바위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자신이 거기 있다.

그날 들여다보고 있던 시집이 생각난다.

모든 시간이 그러하듯 그 역시 지나가고,

나는 지금 지중해 연안에 있다.


메일을 먼저 연다.

밥 한번 먹자는 글월을 보았다. 울컥했다.

그래, 우리 밥 먹자, 머잖은 날, 둘러앉아서.

‘立春大吉’과 함께 온 입춘 소식도 있었다.

그렇구나, 봄이라... 봄 왔으니(오니, 올 것이니, 틀림없이) 크게 길하기로.


비 내리고 흐린 사흘이었다. 오늘은 망설이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해를 맞았다.

1월 1일 바르셀로나 입성,

여행자아파트에서 한 달을 묵고 1월 31일 이사를 했다.

배낭을 메고 보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이제 ‘우리 동네’ 명소로 서있다.

구청에서 엠빠드로나미엔또(거주자등록)를 마쳤고,

경찰서에 니에(외국인등록)를 예약해두고 인터뷰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은행계좌를 개설했고 인터넷도 연결했다.


아침마다 대해리의 날씨를 확인한다.

산마을은 땅부터 하늘까지 꽝꽝 언 호수일지라

(궁극에야 아무리 얼어붙어도 쩍쩍 갈라지고 물 찰랑이고 말겠지만).

돌려놓는 보일러처럼 얼지 않게 틀어놓은 수돗물인데

마을 상수도 탱크 문제로 단수가 된 이틀 동안

그만 학교 부엌으로 들어오는 물이 얼었더라지.

가끔 아이들이 착한 일 하느라고 흘러내리는 수돗물을 잠갔을 때처럼.

하여 흙집에서 길어다 물을 쓰고 있다는데,

문제는 얼어서 터지는 거라.

겨울잠이 필요할 만큼 공포에 가까운 추위는 떠나 있어 고마우나

미안함과 걱정과 ...


교사임용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고,

합격도 했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했고, 그 길을 또 걸어야 하나 했다.

온전히 기뻐했고, 퍽 안타까워했다.

99라인들은 수능을 끝냈고, 아직 남은 결과들이 있다.

그리고 2000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고3이 된다.

재수를 했던 아이들이 좋은 결과를 얻어 다행했다.

한편 퍽 아끼는 두 아이가 나란히 재수를 결정했단다.

그것도 저들로부터 온 소식은 아니고 이러저러 말을 넣은 뒤에 들은.

아이고, 그 지난한 일을 어찌 또 하누.

그래도 하는 결에 하는 게 낫겠지, 아무렴.

공부를 썩 잘하는 아이들이라 결과에 아쉬움 많을 테지.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있겠는가. 그저 기도하나니,

내 기도가 부족해서 그랬던가, 더 간절히 기도하나니.


축구사에는 기적도 많다.

그건 그만큼 어디서나 축구를 많이 한다는 말이기도 할 게다.

하기야 축구만큼 쉬 즐길 스포츠가 어딨겠는가,

공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나.

지구상에 가장 광범위한 놀이가 축구 아니겠는지.

올림픽보다 큰 축제가 월드컵이니.

‘이스탄불의 기적’은 UCL 최고의 대결로 자주 회자되는 경기이다.

04-05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리버풀 FC와 AC 밀란의 경기,

전반 3:0으로 지고 있던 리버풀이 후반 3:3으로 따라붙고 승부차기로 승리했다,

선수 면면을 봐도 팀 전적으로 봐도 누구라도 의심없이 리버풀이 지는 경기에서.

팬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을 불렀다.

리버풀 팬이 아니어도 같이 부를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꼭 리버풀만의 응원가도 아니고, 리버풀 응원가로 만들어졌던 곡도 아닌,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When you walk through a storm

Hold your head up high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And you'll never walk alone


그런데, 이 엄청났던 경기에서 불렀던 그 노래보다 더 가슴 뜨겁게 하는 장면들이 있나니

경기에 진 선수들을 향해 팬들이 일어나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고 있을 때!

바닥에 넘어진 이에게 일어나라 건네는 말 같은,

무릎이 깨졌으나 일어선 그에게 보내는 박수 같은,

정녕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렇다, 그대는, 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독일에서 한 학기, 다시 덴마크에서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내려 준비하고 있는 인영샘,

초등 2년에 봤던 아이가 벌써 대학 4학년이 되었다.

그로부터도 글월이 닿았다.

‘...미래 계획도 세울 겸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려 일기를 틈틈이 쓰고 있는데 

제 가치관의 많은 부분이 물꼬에 의해 형성된 걸 깨닫고는 문득문득 놀라요.

그때마다 물꼬 생각이 나고, 12살, 15살, 20살의 제 모습들이 생각나고...

이제 스무 살 된 새끼일꾼들이 큰 시험 마치고 연락이 왔는데,

다들 2018년에는 물꼬 계자가 없어서 너무너무 아쉬워하더라구요. 이제 스무 살 돼서 얼마나 좋을는지

ㅎㅎ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물꼬를 찾고, 옥쌤을 찾고 하는 데는 다 저와 같은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물꼬에서 성장했듯이요.’

고마울 일들이다.

그리하여 삶은


여전히 살아 고마운 날들이라.


짐도 못다 풀고 끌고 온 일들을 급한 대로 갈무리하고 나서 호되게 한 이틀을 앓았더랬다.

다쳐서 온 손가락은 이제야 좀 편해지고 있다.

건강해야지,

아프면 감당해야 할 게 그 고통만은 아니기 쉽더라.

안 아프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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