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그해를 두 편의 ‘재난영화’(*)로 기억한다,고 과장할 수 있겠다.

삶과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기도 한 개인적인 시간들도 있었다만.

남자 아이가 주인공인 김태용의 <거인>과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 이수진의 <한공주>.

‘아픈 만큼 큰다 巨人’,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두 영화 포스터의 카피였다.

보호가 필요한 나이들에게 먹고 사는 최소한의 ‘정상적 삶’을 우리가 왜 주어야 하는지,

집단 성폭행 현장에서 아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버지가 우리는 아닌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송곳으로 찔렀다.

(이런! 쓰고 있는 지금 알았다, 둘 다 같은 열일곱 살임을. 아, 열일곱 살에 짊어진 무게라니!)

가난에도 성폭행에도 사회는 외면하거나 무책임하거나 아예 무지하거나.

안타깝게도 그게 영화가 아니라는 데 더 큰 불행이 있었다.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말처럼 현실이 스포일러인 걸.

아픔만큼 큰다는데 죽을 만큼 아파서 클 수가 없고,

잘 못한 게 없는데 너 잘못했다고 끊임없이 몰아가는 사회였다.

다행하게도 아이들은 타고난 생명성에 기대고

아슬아슬 줄을 타면서도 견디고 나아가고 있었다.

희망이라면, 그나마 그것이었다!

영화는 스크린을 나와서도 오랫동안 몽둥이를 들고 마구 때렸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려고 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18년 벽두, 한국은 일종의 ‘재난지역’이 되었다.

미투! 나는 고발한다, ‘성범죄를 더는 묵과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여성이라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성폭력 상황은

한국이 안고 있는 다른 많은 문제들처럼

적지 않은 경우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기 일쑤였다.

더구나 가해자는 아버지라거나 상사라거나 신부라거나 이모부라거나 삼촌이라거나

숫제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는 사람들이 행한 가해는 종국에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에 이르기 흔했고

더 이상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시간이 멈춰버린 삶은

(그렇지 않더라도 ‘관계’는 이미 충분히 우리를 비틀거리게 하는 주제인데)

끝끝내 목숨을 저버리게도 했다.

누구도 박복해서, 어느 누구도 불운해서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니었다.

쉬쉬 하는 동안, 수치심에서였건 강요된 침묵이었건, 피해가 사적인 문제로 돌려질 동안

폭력은 공기처럼 우리들 사이를 건너다녔다, 오랫동안, 아주 아주 먼 시간 동안.

그 대한민국에서 나 역시 여자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다...


미투(#MeToo)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인터넷에서 댓글이 부글부글했고 많은 현안들이 덮이기도 했다지만

직접적으로는 가능한한 말들을 아꼈다.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참혹한 심정이 까닭이기도 했겠지만

이런 때 괜히 말을 보태서 모난 돌 정 맞는 듯 할까 봐,

어쩌면 비겁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혼란일 거라 믿고 싶다.

적어도 무관심은 아닐 것을.

혹은 외면이 아닐 것을.

그래도 성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도 믿고 싶다.

고발하고, 공감하고, 치유하고...

그 아픔이 어떤 건지 결코 헤아릴 수 없으나

말이 나와 넘치고 흘러 서로에게 닿고 닿으면 더 나은 공기가 될 거라는 희망...

그래서 오늘은 조그맣게라도 위드유(#WithYou)!

그렇다, 당신은 잘못 없다. 미안하다, 눈 감아서.

나는 네가 어제 한 짓을 보았다, ...


그런데... 성폭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폭력이며 일상의 무수한 ‘폭력’들도 줄을 서 있었다.

어째서 그는, 혹은 나는 그랬던 걸까.

우리 모두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냐 말이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무심코 저질렀을 ‘그래도 된다’가 얼마나 많았을까.

처음에는 들려오는 먼 타인의 경험으로, 다음에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상담했던 이들의 이야기로,

나중에는 크고 작게 일어났던 자신의 기억으로 밀려들던 감정은,

내 일 남의 일 할 것 없이 가해자를 향한 살기가 대책없이 일어나고야 마는 그 감정은,  

마지막에는 폭력에 잠식당해 예민하지 못하고 내가 가했을 폭력들을 짚느라 부대꼈다.

온 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그렇잖아도 나이 들어 앓던 몸을 더 들쑤셔 급기야 병원신세를 지기까지 했다.

그러는 속에 이른 아침 봄을 물고 온 새소리를 들었다.


이슈 하나로 시작했지만,

고백하자면 한국은 까마득하고 물꼬는 가깝다.

이재용이 무죄라고 버젓이 걸어 나왔고, 이명박이 포토라인에 섰지만

숱한 잘못에도 건재한 삼성에 다시 혀를 내두르고(**)

어떻게 노무현이 선 포토라인과 이명박이 선 포토라인이 같이 취급 되는가 얹잖아하기만 잠시,

물꼬에 사람들이 오가고

흙집의 터진 수도를 고치는 동안(물론 일은 그곳에서 벌어지지만)

이곳에서도 인사를 나누고 같이 마음 써서 방법을 찾고 해결하는 일상이었다.

무산샘은 세가 약해진 아침뜨樂의 감나무 가지도 잘랐고,

장순샘은 개사료를 들였으며,

류옥하다는 가마솥방 냉장고에 밑반찬을 채웠고...

햇발동 지하수 언 모터며 새집의 터진 계량기도 고쳐야 하는데...

한국은 먼 어느 나라이고 물꼬는 또렷한 현재이다!


하지만 입맛은 여전히(당연하겠지만) 한국이 가깝다.

밥 때는 현지에 가까워졌지만.

이 나라 사람들처럼 하루 다섯 끼; 서너 시에 먹는 점심, 여덟 아홉시에 먹는 저녁.

멀리 가서 배추를 사와서 세 차례(김치 담을 큰 컨테이너도, 큰 '다라이'도 없으니 )의 김치를 담그는 동안

이사한 집에서 한 달하고도 스무 날이 흘렀다.

빵도 굽고 따빠스 라자냐 핏자 샌드위치 스파게티들도 먹고

주로 오븐을 쓴 야채구이며 염장대구요리도 하지만

그렇게 간간이 한국음식들도 해먹는다.


미용실에 한번 갔으면 좋았을 걸,

오기 이틀 전까지 일을 채우고 오느라 엄두도 못냈다.

한국에서라도 한 해 두 차례면 많은 걸음이지만.

지난주엔 샤워를 끝낸 뒤 욕조에서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대략 흉하지 않을 정도로 균형 맞춰 가위질을 했다.

긴 머리는 그래서 좋다. 정히 안 되면 묶으면 될 것.

아무리 흉한들 어차피 머리는 길거니까.

모자는 또 얼마나 좋은 가림막인가.

몇 나라에서의 3년을 기약하며 한국을 나섰던 2001년,

그러니까 호주로 떠나기 전 미용기술을 배웠더랬다.

당시 예닐곱 되던 물꼬의 모든 식구들은 머리를 맡겨야만 했지.

괜찮아, 또 길거잖아, 그게 무기였던.

여러 나라의 공동체에 머무를 때 그럭저럭 좋은 기술이 되어주었다.

허나, 타고난 재주도 썩 나은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어

오래 안 하다 잘라 준 몇 해 전의 한 특수학급 사내아이 머리는

다음날 그의 아버지가 미용실을 데리고 가야했지, 아마.

여튼, 머리는 긴다!


이제는 세간도 얼추 갖춰졌다.

혼자 살아도 한 살림, 잠시 살아도 먹고 자야지.

집주인이 챙겨준 것도 있고, 이웃에서 나눠준 것도 있지만 직접 사야할 것들도 있기 마련.

시카고에 살던 한 때가 생각난다.

그때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우리 집 아이가 십자말풀이를 하고 있었다.

‘무’자로 시작하는 네 글자가 뭐 있을까?

아이가 외쳤다, 무빙세일! 너무나 확실해서 다른 낱말은 있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빙세일에서부터 가라지세일 블락세일 러미지세일 ...

지역신문에 난 별별 벼룩시장을 다 다니며 살림을 채웠던 그때였다.

5달러에 샀던 TV도 있었지.

그리고 떠나면서 나 역시 무빙세일을 했다.

여러 곳으로부터 집으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종이 발자국을 붙이고 풍선을 매달고

쿠키도 만들어서 내며 그간 정을 나눈 이웃들에게 인사도 하는 잔치였더랬다.

아, 뉴질랜드로 넘어가며 입었던 옷도 호주의 세컨드샵에서 산 외투였네.

바르셀로나에서도 집을 얻고 난 뒤 젤 먼저 재활용가게를 찾았다.

기부를 받아 물건을 갖추고 그 판매금액으로 학교 기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

필요한 것도 구하고 그만큼 기부도 할 수 있는.

그래서 다소 비싼 게 있어도(그래도 일반가게보다는 비싸지 않은) 흔쾌한.

떠날 때 여기서도 무빙세일을 하거나, 이곳 문화는 또 그런 게 없더라만,

들어오는 이에게 나누거나, 재활용가게에 기부하거나 것도 아니면 쓰레기통으로?


여기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수월해서 좋다.

산골인 물꼬에서는... 가끔 아파트의 분리수거가 그립곤 하니까.

커다란 쓰레기통이 다섯 가지 색깔별로 모퉁이마다 두세 개 혹은 대여섯 개씩 있다.

없는 통이 있어도 다음 블록에 가면 있는.

그런데 대충 버려도 과태료를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꼬박꼬박 제대로 분리하려 애쓰는 건

여행객은 떠나겠지만 주민은 남으니까.

지금은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음!


마지막으로 산 것은 요가매트였다. 서너 주 됐나...

아침수행을 시작했다.

등으로 오는 근육통이 격심해 팔도 다리도 한 치를 뻗을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얼마쯤은 하고 얼마쯤을 또 그렇게 쉬지만,

아예 치워두지 않고 눈이 가는 곳에 세워져 있다.

매트는 마루바닥이라 수행방이라 들판이라 기도처라.

잊지 않으면 하는 것이고,

하면 더 하게 되고,

그렇게 생활을 잘 닦으면 자신도 세울 수 있으리.

그거면 또 얼마를 살아낼 힘일!


간간이 물꼬 바깥식구들의 소식을 듣는다.

마음이 어려움을 겪을 때면 메일을 보내온다.

그저 몇 자 마음을 담아 전하지만 살아갈 힘이 된다고 했다.

고맙다, 멀리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어찌들 지내시는가, 저기 오나 열어보는 창문처럼 기웃거리는 마음,

무소식이 희소식일줄 안다.

나날을 정성스럽게 살기로.

나날을 견지해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수행이고,

어쩌면 모든 것!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가까이 있다면 집어 들고 싶은 책 하나 <용서의 나라>(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책세상).

‘강간이 일상화된 오늘의 현실을 아프게 일깨우면서,

남녀 모두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이 문제에 동참할 것을 뜨거운 체험의 언어로 설득’한단다.

폭력(꼭 성폭력만이 아니라)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지 않을지.

읽으신다면 나중에 물꼬에도 보내주시면 기쁠.

아,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도 같이들 읽었으면.


(*) 김태용의 이 영화에 일종의 재난영화라는 표현을 한 평론가가 있기도.

(**) 이명박을 불러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모든 일상 구석에서 다스는 누구 거냐 끊임없이 물었던 국민이었다.

     삼성 총수 일가에 범죄를 물을 수 있는 방법도, 언론이 기사 한 줄 쓰지 않아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말하는' 것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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