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달날 맑음

조회 수 1213 추천 수 0 2005.06.17 17:29:00

6월 13일 달날 맑음

비벌리 클리어리의 <헨쇼 선생님께>을 읽어주고 있습니다.
밥알 안은희님의 선물입니다.
동화평을 쓰거나 아이들 글쓰기작업에서, 동화강연을 하며
예전엔 주에 한두 차례는 서점에서 보냈더랬지요.
그런데 산골 들어오고 나니 나가기 쉽잖고
인터넷 사용도 편치 않은지라
이런 선물 반갑기 더할 밖에요.
한참 만에 구경한 새 책이랍니다.
늘어선 편백 나무 아래서 읽어주고 있노라니
자글거리는 아이들 웃음 위로 거기 평화의 세상이 번져갔지요.

시골 나먹은 선생이 동네 어르신들과 술이 거나해져서
픽 쓰러진 사택이 해 돋도록 조용한데
교실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머뭇거리다 공부하자며 몰려간 어느 소설의 한 풍경,
오늘 아침이 그러했더랍니다.
몸에 퍼진 독이 빠지지 않아 해건지기에서 몸풀기까지 저들끼리 꾸리고
간장집 앞에서 샘, 샘 하고 불렀답니다.
그제야 부스스 일어났지요.
마악 웃음 번지며,
막 행복해지는데,
이 산골 삶이, 이 아이들과의 삶이 어찌 이리 달지요,
뭐 학부모님들이 들으면 당장 선생 목 달아날 일이겠습니다만.

큰 마당 건너 긴 돌의자에서 아이들이 글을 씁니다.
여름을 읊었지요.
곁에서 하나씩 불러 귀도 닦고 손톱도 깎습니다.
한 녀석씩 나와서 제 쓴 글들을 읽어도 주었지요.
노래가 따로 없습니다.
악기가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합니다.
아이들의 목소리도 풍경입니다.
또, 마악, 퍼지고 퍼지는 기쁨입니다.

머물고 있던 연이샘이 오늘 떠나게 되었습니다.
달포만 있기로 한 걸음이 길었습니다.
아침 저녁 푸성귀에 물을 대며
밭고랑을 기며
오래 고생하셨습니다.
연이샘이랑 하는 서양화 색놀이 시간도 마지막이네요.
겨울을 버팅겨 주던 창문 비닐들을 떼놓고 나니
좋은 미술공부 재료가 됩니다.
비닐 이야기 그림을 그렸지요.

"아무리 좋은 술도 지나치면 독이다!"
"술은 술잔에 차는 찻잔에!"
뭐 그런 깨달음을 남긴 간밤이었다나요.
방문자 정은영님 유영숙님, 그리고 모남순님이랑
날이 훤하도록 가마솥방에 있었습니다.
겁 없이 차 마시듯,
우리는 아침에 어마어마하게 큰 더덕주 항아리가 발가벗기운 걸 보았댔지요.
"대해리 내려오고 이리 죽도록 취해본 적이 없습니다."
"맨날 술 얘기 나오던데..."
물꼬를 '연구'해서 도대체 이 공간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유영숙님조차
예는 날마다 곡차 도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야 겨우 막걸리 두어 잔이었지요."
"일어났더니 선생님들이랑 연애한 거 같애요."
정은영님이 그러시데요.
들어올 때부터 맥주 두 상자를 들고 나타나더니
그만큼 물꼬 술도가지를 퍼내고 가셨네요.
그 도가지 깊이만큼 서로에게 깊었기를 바랍니다.
이런, 그런데 넘의 집에 와서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난 건 뭐랍니까.
술은 술이지요, 하하.
점심 드시고 갔더랬는데, 머잖아 진 빚 갚으러 다시 오시겠지요...
두 분이 보태주신 손이 참말 컸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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