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 vales bene est, ego valeo.

(당신이 편안하다면 다행합니다. 저도 잘 있습니다.)


아무리 기세가 등등해도 8월 15일이면 허리가 꺾이는 더위입니다.

여느 대해리라면 벌써 서쪽 운동장 가 은행나무가 초록빛을 잃는 게 확연할 것입니다.

계자를 몇 차례씩 하던 여름,

15일이 들어있는 마지막 계자는 추워서 잠이 깨던 밤이었더랬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을지요...


1. 그라시아 축제


바르셀로나는 거리가 텅 비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스페인은 8월 한 달 집중적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유명하다지요.

거주민들이 비운 도시에서 관광객들을 자주 마주칩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 유독 북적인 곳이 있었으니 그라시아 위쪽 지구였습니다.

(이 그라시아 지구 아래쪽 끄트머리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있고,

그 곁이 저희 집입니다.)

바르셀로나 어디를 가도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반면

그라시아는 현지인들이 적지 않고 그런 만큼 로컬 분위기 또한 많이 가졌지요.

느긋한 보헤미안 분위기에다 몇 개의 광장은 분주하고

활기찬 바와 풍성한 카페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8월 15일부터 21일까지 그라시아 거리 축제가 있었고,

축제 전부터 그곳에 자주 달려갔습니다.

준비 과정에 함께하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준비되는지 그 뒤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FC바르셀로나의 구장 깜프누가

까딸루냐 역사와 영혼을 함축적으로 가진 곳으로 첫째라면

그라시아 축제 또한 그 못지않을 것입니다.

스페인내전에도 이들은 축제를 이어가며 프랑크에 맞섰지요.

대형기획사가 맡고 돈을 마구 뿌리는 공무원 중심의 축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각 거리의 거주민들이 준비하는 지역축제입니다.

축제 전야에도 여기저기 기웃거렸습니다.

아이가 전시용으로 매어달 책을 접는 곁에서 같이 책을 접고,

할머니들이 만드는 꽃을 같이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가족들 곁에서 같이 붓을 들고...


이 축제는 원래 해마다 5월 15일 성 이시드로(농부의 성인)의 날을 기리며 시작됐는데,

1812년 지금의 그라시아 거리(Passig de Gracia)에 있던 수도원이 사라지면서

그 수도승들이 그라시아의 Esglesia dels Josepets 수도원과 성당으로 이주했고,

그때부터 8월 15일에 승모승천일을 기리기 시작했다 합니다.

1850년 바르셀로나에서 독립된 하나의 도시가 되면서 본격적인 축제가 되다가

이후 그라시아가 바르셀로나로 다시 병합되어서도 축제를 지켜왔다지요.

20세기 들어서는 무대예술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유명 예술가들의 참여도 늘었다 합니다.

그런데, 2017년 작년을 200주기 기념이라 하였으니 1817년을 원년으로 보는 건가요...


놀라운 독창성과 창의성으로 블록마다 주제를 정해서 재활용품들로 거리를 꾸미고,

유쾌한 경쟁 끝에 마지막 날 최고로 뽑히면

음악대들이 연주를 하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속에 상을 받습니다.

올해는 책의 역사, 미야자키 하야오, 꿀벌, 바쿠스신, 헤라클레스, 킹콩, 바다 마을,

교통수단, 의상의 역사 들이 있었습니다.

광장이나 거리에 무대가 설치된 곳에서 벌어지는 콘서트도 있지만

길거리 공연도 대단한 열기였지요.

따로 둔치에 설치하는 게 아니라(물론 광장의 특별무대 혹은 전시도 있지만)

대개 자기 집이 가게가 됩니다.

거리꾸미기에 참여하지 않는 블록은

그 나름대로 축제에 맞춰 특별 음식들과 음료들을 내놓고 잔치를 엽니다.

정치적 발언들도 빠뜨릴 수 없지요.

여전히 까딸루냐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이 포스터를 붙이고 노란리본을 나눠주고,

여행객숙소 때문에 높아진 월세로 정작 주민들이 쫓겨나고 있다는 호소도 있었습니다.


물결처럼 사람들이 흘렀습니다.

바르셀로나를 넘어 스페인 전역에서들 왔고,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행복해 보였고, 행복했습니다.

바르셀로나가 더 좋아진 한 순간이었습니다.

‘시민’, ‘지역’이란 낱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더랍니다.

축제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었습니다!


2. 이민자와 각설이와 고양이와 쥐, 그리고 나


허핑턴코리아의 인터뷰 하나를 읽었습니다.

인터넷상에 오래 머물지 않는 저 같은 사람에게야 이제야 닿은 소식이지만

이미 유투브며 sns에서 손주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브라질에서 36년 거주한 이민 선배였지요.

그가 '탈조선'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는데,

이민의 장점을 말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민을 가게 되면 한국에서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쉽게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교사로 일하다 보니 남에게 행상을 한다든지, 주문을 받는 일을 하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브라질에서는 다 내려놓다 보니 뭐든 쉽게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왜 한국에서 ‘그걸’ 할 수 없었을까요?

이민을 가서는 할 수 있는 날품팔이도 한국에서는 왜 못하는 걸까요?

우리는 뭐 그리 지킬 것이 많은 건지,

아니 남들은 놔두고, 나는?


마침 며칠 전, 한 각설이의 공연을 보고 쓴 선배의 글이 닿았습니다.

우리는 장터에서 각설이가 노는 광경에 더러 그만 낯을 붉히고는 하는데,

왜 그랬던 걸까를 돌아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수백 만 번의 수치심을 내려놓은 부처가 거기 있었다고 했지요.

각설이는 그렇게 집중해서 타령을 하며 놀지 않는다면

결국 내가 내려놓은 것들이 좀비처럼 일어나 자신을 달겨들지도 모르기에

그 마당은 그토록 처절하게 싸우는 전장이었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 했습니다.

내가 각설이 타령을 저만치 지나친 것은

‘나’는 그와 다른 사람이라서 얼굴을 돌린 게 아니라

바로 내 어떤 모습을 거기서 보기에 그만 민망해져버려 멀리 돌아가는,

아니면 인생사의 처연함과 맨바닥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도망가 버린 건지도.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고,

현재 내가 마주하는 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 무엇 하나, 아무것도 억울할 것 없습니다.

‘그리움’과 함께 내 핵심감정의 하나로 떠오르고는 하던 ‘억울함’이

그제야 머리 풀어헤치고 인사하며 떠나가는 듯했습니다.


어린 날 외가에서 보낸 어느 해질 녘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들에 나간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혼자 마루에 올라 안방 문을 여는데,

고양이가 쥐 한 마리에게 달겨들어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아직 목숨이 붙은 쥐는 이리저리 몸을 끌어 도망을 가고

고양이를 기어코 쥐를 갈갈이 찢습니다.

온 방에는 피로 그은 그들의 행적으로 가득했습니다.

어쩌다 뱀도 장롱 밑에 있더라는 어느 집 이야기를 전해 듣던 그런 옛적이었지요.

여러 날 밥을 먹지 못하게 했던 일화였지만

훗날에는 삶의 처절함을 되새기는 역할을 제게 합니다.

고양이는 고양이의 삶을 살았고, 쥐는 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순간은 그때까지의 고양이의 삶의 결론이었고,

찢긴 쥐의 죽음은 그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누가 나빴거나 옳았다는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는 일은 엄중하고, 결국 우리는 밥이 필요하지요.

저는 그렇습니다!

나태함을 경계하며, 동지들을 생각하며 각설이타령을 할 참이라고나 할까요.

몸의 통증을 이겨내고 말입니다.



바르셀로나까지 여럿 다녀갔고, 두루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동안은 바르셀로나가 물꼬였군요.

반가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습니다.

지난 주말엔 대해리에도 여럿 모였다는 소식입니다.

특히 휘령샘이 애를 많이 쓰셨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멀리 있는 이에겐 멀고,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겐 금세일 시간,

넉 달을 남기고 있군요, 귀국까지.

늘 하는 말대로 각자 잘 지내는 게 서로 돕는 것,

남은 날도 서로 잘 지내기로.


그립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옥영경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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