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학교 물꼬, 들어봤어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모씨에게 들었던 것 같다' 했습니다.

한국의 한 출판 편집자와 주고받던 메일에서였지요.

모씨... 제가 아는 이가 맞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함이 남은 인연이었습니다.

답메일을 보냈습니다.

"새로운 학교 운동이 한창이었던 90년대 중반

적지 않은 이들이 서로에게 스쳤습니다.

그 분이 제가 아는 분과 동일인인지,

또 그때의 사람이 2018년 지금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은 죽도록 변하지 않으면서 또한 엄청난 변화를 겪기도 하더군요.)

제가 아는 그 분은 좋은 분으로 기억되는 군요.

고마울(지나고서 그리 기억됨이) 일입니다."


설혹 우리가 서로 나쁜 기억을 가졌을 지라도

그도 나도 변화를 겪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그는 그 때 만난 그이지 지금 그는 아닐 테지요.

그러니 우리는 과거에 만났던 이를 안다고 말 못하지 않을지.

하여 아주 나쁘게 그것도 깊이 생채기를 남긴 이조차

지금까지 그를 미워할 건 아니겠습니다.

지나간 인연들에 대한 제 결론이랍니다.


삶이란 게 밥으로 목숨을 이어나가는 일이지요.

여기서도 밥을 먹고 삽니다.

이곳의 아침거리 하나는 곡식을 볶은 것입니다. 일종의 오트밀.

아니, 바로 그게 오트밀이네요. 귀리를 볶거나 찐 뒤 갈거나 눌러서 만든 죽이 오트밀. 

우리 납작보리처럼 납작귀리를 파는 데 그걸 사다 볶았습니다.

처음엔 마른 채로 볶다가 통깨 볶던 생각이 났겠지요.

물에 씻어 채로 건져 그처럼 볶았더니 맞춤하였습니다.

그걸 우유에 말아 크로아상과 함께 아침으로 먹는답니다.


어제는 고추장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유학생 하나가 밥을 해먹겠다고 고춧가루를 샀으나

뜯기만 하고 한 번도 쓴 적이 없이 귀국을 하게 되었다 했습니다.

곱게 빻은 고춧가루라 고추장을 만들면 좋겠다 싶었지요.

대만산 찹쌀가루를 사와 엿기름 가루와 함께 고아 조청을 만들고

맛이 떨어져 요리에 쓰고 있던 적포도주도 넣었습니다.

마늘도 쪄서 으깨 마늘고추장을 담을 참이었지요.

그런데 메주가루가 없었습니다.

한국식료품가게에도 역시 없더군요.

그걸 찾으러 온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까지 했다 했습니다.

그럼 발효를 위해서 무얼 넣을까 하다 액젓이 생각났네요,

마침 쓰던 걸 다 써서 한국가게를 갔겠지요.


하지만 그곳에도 액젓이 떨어졌다 했습니다.

예전만큼 액젓을 찾는 이들이 잘 없다지요.

fish sauce라도 사야지 했는데, 주인이 당신 쓰시는 게 있다며 선뜻 나눠주셨습니다. 감동!

30년 전 태권도 사범으로 이민 온 남편분과 결혼하며 갓 스페인으로 오셨다는 분입니다.

언젠가는 유통기간이 가까운 식품 몇 가지를 챙겨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답례로, 일 끝내고 밥상 차리려면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퍽 더웠던 날 두어 차례 음식을 해서 날랐던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살며 평생 그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고 두고두고 고마워하셨더랬습니다.


이곳에서 나이든 한국 유학생 두엇도 알고 지냅니다.

아주 가끔 집으로 초대해 밥을 먹었지요.

지난 한가위에 연휴도 없이 해부실습이며로 집에 홀로 있던 저희 집 아이에게

이웃집에서 한가위 음식을 나눠주었다 했습니다.

제가 바르셀로나에서 젊은이들에게 나눈 음식이 한국에서 제 아이에게로 갔다 할까요.

세상은 그렇게 굴러갑니다.


9월 마지막 주는 한가위를 지나고 있었겠군요, 한국은.

잘 쉬셨을지요?

제가 로마에서 띠레니아해(지중해 해역)를 건너오고 있을 때

이곳도 메르세 축제(자비의 성모 마리아의 날, 9월 25일)로 뜨거운 주말이었다 합니다,

그 유명한 인간탑쌓기도 하는.


걷는 양이 많았던 9월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와 로마 안내(?)를 맡기도 했더랬지요.

한동안 살았다고 현지주민의 느낌으로

관광객들이 잘 모르는 숨은 보석 찾아 보여주기쯤이었다고나 할까요.

까미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일부 구간을 걷기도 하였습니다.

건조하고 거칠고 지루하다는 메세타(중부평원지대)를 택해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200여 km.

대개 180km인 길을

중간에 이제는 텅 빈 로마 옛길을 따라 24km를 걷기도 하고

옛 성에 있는 곳을 돌아가기도 하여 좀 더 길었던 여정이었습니다.

너도 나도 가는 길이라 유행을 좇는 것 같아 고개 돌렸던 까미노였는데

넘들 간다고 아니 가겠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싶을 때 구나 하고

스페인 와 있는 참에 걸어보자 했더랬지요.

한국에서 사랑하는 벗이 건너와 둘이 걸었습니다.

그와 함께라서 걸었다 말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겝니다.


10월, 벌써 지중해의 볕도 퍽 기울었습니다.

대해리는 밤이면 겨울이 동구 밖을 서성이고 있을 테지요.

여름 끄트머리 휘령샘이며 무범샘이며들 다녀가고,

장순샘과 서희샘이 가끔 학교를 들여다보고,

엊그제는 류옥하다가 학교아저씨와 영동 읍내에서 만나

전화기도 바꿔주고 필요한 것들을 안겨드렸다 합니다.

논두렁 분들이 여전히 학교살림을 보태고도 계시지요.

모다 고맙습니다.


이곳도 서서히 벌여놓았던 일들을 마무리할 때입니다.

또 소식 올리겠습니다.

부디 우리 마음에도 찬란한 단풍물 아롱이길.


바르셀로나, 옥영경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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