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기가 막히게 푸르고, 가을 냄새, 바다 냄새가 나는 신선하고

깨끗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바르셀로나는 언제나 10월의

바르셀로나였는데, 그때 도시의 영혼은 산책하러 나오는 듯하고 사람들은 카날레타스

샘물(람블라스 거리에 있는 샘)을 마시기만 해도-이 기간에는 기적처럼 소독약 맛도

나지 않았다-현명해지는 듯했다.

(<바람의 그림자> 1권, p.169)


이제 집안으로 더는 해가 들지 않는 긴 겨울을 건너고 있다.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지중해의 날씨는 고맙지만

구들이 그리운 한국인들은 뼈가 시린 이곳 겨울이라고들 했다.

15여 년 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보내던 겨울에도 같은 생각을 했던 듯하다.

겨울 저녁 바삐 내리는 어둠은 대체로 기억의 무더기와 함께 온다.

그것들은 풍경이기보다 사람이다.

그들이 꼭 어둠만 타고 오는 건 아니었다.

산이 담긴 엽서를 보다가, 길모퉁이를 돌다가, 건물 사이 하늘을 보다가,

숟가락을 들다가, 차를 마시다가,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벽을 보다가도 그를 보았다.

지독한 통증을 동반한 병상에서 나는

병상의 날도 어떤 사람으로부터 떠나는 신열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억이란 정말이지 질기다.

사람살이, 사람이 사라진다고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표적이라 할 만한 스페인(어)문학 셋도 '기억하다'는 동사와 함께 시작한다.(번역인 정동섭 왈)

근대소설을 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러하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옛날, 이름까지 기억하고 싶진 않은 라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 창꽂이에 

꽂혀 있는 창과 낡은 방패, 야윈 말, 날렵한 사냥개 등을 가진 시골 귀족이 살고 있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도 그렇다.

‘몇 년이 지나서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에,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 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안정효 역)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역시 첫 문장에서 기억을 말한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 

<바람의 그림자>에서 ‘잊혀진 책들의 묘지’의 묘지지기 이삭의 딸이자

주인공 훌리안 카락스를 사랑한 누리아가 그랬다,

기억하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있다고.

내가 그를 기억하는 동안 그는 살아있고,

누군가 기억하는 동안 나 또한 살아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거리 거리(주로 고딕지구, 그리고 티비다보)를 누비며 진행되는

소설 <바람의 그림자>(한국어판)를 이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읽고 싶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람들 사이에 거래가 된 흔적은 있었으나 사라졌다.

메일을 보내고 쪽지를 보내도 소용이 없었다.

영어판이라도 구하자 할 때

내게서 한국어로 된 책을 빌려 읽던, 교환학생으로 온 여학생 하나가

한국에서 여행을 오는 선배 편에 부탁해 책을 구해주었다,

필요하다면 한국까지 가져가라며.

물꼬 일도 그렇지만 늘 젊은 친구들의 호의를 기대는 일이 많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건 진짜 이야기야. 우리에게 가져온 이 빵이

적어도 사흘은 묵었다는 사실처럼 너무도 틀림없는 이야기지. 그리고 모든

실제 이야기들처럼 묘지에서 시작해서 묘지에서 끝나....”

<바람의 그림자> 1권 p. 285에는

주인공 다니엘이 베아에게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소설로

끊임없이 마술적 현실주의라는 마르케스 소설의 특징을 떠오르게 하고,

달변(꼭 캐릭터 페르민이 아니어도)은 돈키호테를 생각나게 한다.

카를로스가 스페인 문학의 명맥을 유지한다고 듣는 소리에는 이런 까닭도 있을 것이다.


출판사 서평은 이랬다; “보르헤스를 연상시키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바탕 위에 에드거 앨런 포의 미스터리와 공포, 찰스 디킨스의 아이러니, 빅토르 위고의

역사 서술, 움베르토 에코의 본격 추리 등의 요소들이 절묘하게 녹아든 모방이 불가한

완전무결한 이야기는 마치 양파껍질처럼, 내부에 여러 개의 미니어처를 품고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 펼쳐진다.”

두 권이 단숨에 읽히지만 책을 덮고 나면 열댓 권의 대하소설을 건넌 느낌이다.

1945년 여름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한 소년이 우연히 갖게 된 한 권의 책,

물론 ‘바람의 그림자’이다,

그 작가를 쫓으며 겪는 사랑과 증오, 복수와 배신, 부재와 상실 들의 이야기.

1930년대 스페인내전 전후 30여 년(1919년~1955년)을 배경으로 한다.

2001년 스페인에서 처음 나왔고, 한국 번역은 2012년.

이 소설은 사폰이 구상한 ‘고딕 바르셀로나 콰르텟’의 제1부에 해당된다지.

프리퀄인 <천사의 게임>, 제3부인 <천국의 수인>도 번역이 되어 있다.


잿빛 바르셀로나로 시작한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그 빛깔처럼 스민다.

이즈음의 나는 읽는 이로서보다 쓰는 이로 책을 읽게 되더라.

20여년 만에 개인적인 글을 써보려는 시도를 하는 해여서도 그렇겠지만

성장소설이고 로맨스소설이며 추리소설이고 미스터리물인,

소설의 모든 장르를 다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

글쓰기에도 좋은 공부가 된다는 말이다.

바르셀로나의 풍광, 그리고 등장하는 소품들, 인물까지도,

묘사가 뛰어나 심지어 기록문학으로 읽히기까지 한다.

재밌고 즐겁고 아름답고 슬프고 설레고 감동적일 밖에.

책을 읽는 동안에도 바르셀로나 지도를 놓고 거리를 찾아보느라 자주 멈췄다.

스페인 사람 특유의 넉살과 과장을 지닌 페르민도 페르민이지만

어릴 적 상처를 안고 죽는 날까지 복수로 치달았던 푸메로에 대한 연민으로 아팠다.

내가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선생은 훌륭한 치유자라는 생각을 다시 한.

제목 '바람의 그림자'는,

사는 일이 바람이며 바람은 떠나지만 그 부스러기들이 결국 지상에 남는다는 뜻이었을까.

죽어간 이들로 허망하지만 빛 속으로 다시 나온(출간으로) 카락스의 결말로부터

결국 사는 일의 희망에 대한 문학으로 해석하기로 한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1년 동안

인근 도시 몇과 북부 바스크지방, 남부 안달루시아지방,

그리고 산티아고 까미노를 걸었으나 따로 누군가 진행하는 투어 일정에 동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난 12월 22일 흙날 낮 5시 람블라스 산타 모니카 9번지로 갔다,

람블라스 대로가 시작되는 콜롬부스 상이 가까운.

<바람의 그림자> 투어 출발지였다;

http://iconoserveis.com/en/the-shadow-of-the-wind-tour/

영어사용자로 신청을 하였으나

신청자가 없어 그런지 영어 투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고

스페인어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바르셀로나 현지인 여성 셋과

아르헨티나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온, 유모차에 태운 아이와 동행한 젊은 부부.

스페인어로 진행하면서 이동 시 내 곁에서 영어 안내를 해주었다.

같은 투어를 5여 년 진행하며 다소 감흥이 식은 듯한 안내자였네.

소설에 등장하는 거리에서 모자, 만년필, 타자기 들이 있는 가게를 지났다.

레알광장을 가로지르고 산타마리아 델 마르, 몬카다 가, cafe 4cats(엘스 콰토르 게츠),

산타아나 가, 카누다 가, 아테네오 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 문화센터?)

그 거리에서 안내자는 스페인어로 소설의 구절들을 읽었다.

불과 얼마 전 들여다 본 덕에 되살리기 어렵지 않았고, 감동이 다시 밀려왔다.

바르셀로나로 오신다면 참가해보시라.

고딕 지구의 좁은 골목과 눅눅함, 그리고 새벽안개와 비의 바르셀로나가

책에서 나와 눈앞에 재현되리.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바람의 그림자> 투어단을 모집해

이 도시에서 한국어로 안내하고픈.

그라시아 지역축제를 보며 모름지기 지역축제랑 저러해야 한다며

지자체 축제 관련 사람들을 끌고 이 도시를 다시 올 계획을 짰던 것처럼.


호사(好事)였고 호사(豪奢)였다.


덧붙임 1.

<바람의 그림자>를 읽은 이들과 공유하는 대목;

2권에서 아주 놀란 두 곳은,

p.124 베아의 전화를 기다리는 긴 긴 날의 다니엘이 하는 말, 7일 안에 내가 죽을 거라는.

그리고 p.225 소피가 미켈에게 하는 페넬로페와 훌리안의 관계에 대한 한 문장.

충격에서 잠시 헤어나지 못했던.


덧붙임 2.

지역도서관에서 영어 동화책을 주에 한 권씩 읽으며 활자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적

멀리서 여러 벗이 한국어로 된 책을 챙겨주었다.

토마스 쿡의 <붉은 낙엽>, 줌파 라이히의 <축복받은 집>, 

존 허스트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다시 읽은 <카탈루냐 찬가>,

<사는 게 뭐라고> <언어의 온도> <어른의 맛>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류동민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안치운의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김애란과 김연수의 소설들, 그리고 시집 몇 권.

늘 하는 것보다 받는 게 많은 생이다.

열심히 살겠다.

그런데, 급속도로 눈이 나빠져 벗이 여행을 오며 돋보기를 사다 주어야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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