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떠나 아주 오래 비워두었던 산마을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들은 손전화로 비상벨을 누르는 법부터 알려주었다,

산골에 혼자 있다 쓰러지시면 어쩌냐고.

병원과 가족들에게 바로 이어지도록 설정해주었다.


길 위에 있었다.

여러 차례 간 길인데도 몇 차례나 길을 잃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망가져있던 내비게이션 기능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흐려가던 하늘, 눈 싸라기가 시작되었다.

고개, 라기보다 산을 잘못 넘어가기도 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벗은 떠난 지 오래나

그의 인연을 챙겨 남겨진 사람에게 꽃 한송이 전하고 돌아왔다.

길을 더듬거리다 빨간신호를 채 인지하기 전 신호위반 카메라가 번쩍였다.

긴 길이었고, 긴 마음이었다.


대해리는 눈이 굵어졌다.

12월이면 김장을 하고, 꼭 이렇게 눈이 내렸다.

2018년 12월 나는 한국에 있지 않았다.

고로 김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한국이 아니라고 해서 김치를 담아먹지 않은 건 아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중국가게를 찾아가면 배추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솜한 배추까지 바랄 수는 없다.

그저 배추 형상을 한, 배추 자체가 갖는 맛이 아니라

오로지 양념에 의존한 김치를 담는 것만 가능했다.

그렇게 몇 차례의 김치를 담고 나누고 먹는 사이 한 해가 흘렀고,

나는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8년이 가는 겨울에 하지 않은 김장이란 말은

2019년 먹을 김장김치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한해 이웃의 장순샘네며 남도의 집안 어르신이

때때마다 물꼬에 김치를 전하기는 했다.

돌아오니 이웃마을 장순샘이 바닥난 김치통부터 채워주었다.

이웃 절집에서 나눠도 주었다.

(2.11 덧붙임: 나주에서 민수샘 어머니가 보자기에 곱게 싼 김치통도 실려 왔다!)

김장을 하지 않아도 김장김치가 떨어지지 않은 겨울이다.

하지만 여느 해의 물꼬 살림에 견주면 턱없는 규모.

물꼬에서는 김치냉장고가 없지만,

봄이 오면 김장독에서 김치를 꺼내고 짜고 얼려

새 김장을 할 때까지도 밥상에 여러 김치요리를 올려왔다.

올해는 그 과정에 먹을 김치가 모자란다는 뜻이다.

“양념이 많이 남았는데, 김치 좀 담으실래요?”

장순샘이 물었다.

“헤헤, 올 겨울은 김장 좀 쉬어볼까 하는 걸요.”

곧 봄, 달래도 고들빼기도 캐면 되는 걸.

아직 몇 집에서 나눠주겠다는 김장김치도 있었다.

다른 집에서 시어 잘 먹지 않겠다는 김치도

물꼬에서는 뭔가 별미 요리로 변할 수 있지 않던가.

올 겨울은 그렇게 배추와 일별키로.


대해리는, 아니 전국적으로 갈수록 김장시기가 당겨지는 듯하다.

김장이 이르니 배추 파종도 이르다.

김치냉장고 탓인지 덕인지 일지도.

물꼬는 여름계자 일정을 마무리하고 서둔다고 서둘러도 파종이 늦고

김장도 가을학기 흐름상 12월이 되어야 할 수 있다.

물꼬 교육일정에 맞춰 농사도 움직이니

이 골짝 다른 집보다 번번이 한 발이 늦는. 게으름도 한몫한다.

시기적으로 지력이 약한 때에다

유기농이랍시고 하는 부족한 손놀림도 그렇고,

부족한 거름으로 배추도 별수 없이 약하다.

포트에 씨를 뿌려 키우고, 그것을 밭에 옮겨 심는다.

방심한 사이 고라니가 톡톡 배추를 끊어 먹으며 휩쓸고 지나면

다시 빠진 자리에 배추를 심는다.

처음부터 배추가 그 자리에 없었던 양한 그곳에.

오줌과 음식물로 만든 퇴비를 뿌린 밭이다.

보름이 지나면 배추의 생사는 확실해지고

그때부터는 달포를 아침마다 벌레를 잡으며 보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는 일은 서리가 내릴 때까지 이어진다, 그때부터는 어니까.

대체로 묶어줄 것도 없이 김장배추라기보다 봄동에 가깝도록 부실하지만,

굳이 짚을 얻어다 묶어주기도 한다.

속은 배추 저의 일이지만 바깥은 사람의 일이거니 하고 꼴새를 갖춰주는 셈이다.

하지만 도저히 묶여지지 않고 치마폭을 활짝 펼친 것들이 있다.

거기로 마른 나뭇잎들이 날아들어,

어느 모자란 여인네가 치마 풀풀 헤치고 천지를 헤매었더냐 궁시렁거리며

배추를 씻고는 했더랬다.

하지만 그 세월도 지난 지 수년이다.

최근 한참은 유기농장 광평 조정환샘네서 배추를 같이 키웠다.

말이 ‘같이’이지 순전히 얻어다 김장을 했다.

이웃마을 장순샘네 텃밭에 남겨진 배추도

배춧국으로 우리 배추밭인 양 뽑아다 먹었다.

그래서 주인처럼 그에게 늘 물곤 하였나니,

우리 밭 평안한가(관리는 잘하고 계시냐는 점검?).

그래도 무는 우리가 키워 먹었다.

배추 보내준 댁들에 나눠주는 해도 있었다.

무말랭이와 말린 무청시래기는 초여름까지도 큰 먹을거리가 되었다.

특히 6월 행사에서는 꼭 시래기국밥을 냈더랬다.


김장 시 내 최대임무는 밥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 먼저 하는 일들이 있었다.

멸치젓을 달이고 내려 액젓을 만들고,

김치에 들어갈 양념수에 북어대가리며 온갖 것을 넣어 끓여놓고,

찹살가루로 풀도 쑤고,

마늘과 무를 갈아다 놓았다.

사람들이 들어와 간한 배추를 씻어 건지고 양념으로 들어갈 채소를 다듬을 때

비로소 나는 김장 라인에서 물러나

수육을 삶고 굴을 씻고

파전을 부치고 고구마를 굽거나 튀겼다.

내리 달려 가마솥에 메주도 쑤고 콩 삶은 김에 청국장도 조금.

어떤 해는 고추장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버렸다.

김치는 배추김치가 끝이 아니었다.

총각김치에 파김치, 통무우로 독에 물김치까지.

그리고 밤이 깊어진 대해리,

난로에 아홉 개의 연탄을 다 집어넣고 곡주 잔을 높이들 때

그 맘 때는 대체로 눈이 내렸다, 지금처럼.


비로소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뒷정리로 하루를 보냈을 김장 일정 대신

올해는 그간을 반추하는 것으로 김장을 대신하고 있네.

내게 김장은...

힘이 들지만 힘이 나는 일이다.

노래(함께하는)고 저항(자본 아래의)이고 실천(몸으로 하는)이고 삶(나날이 사는)이다,

그리고 혁명(거대하게 저 아래서 용솟음쳐 오르는 전복의 힘이거나

가치를 견지하는 것에 대한 강한 선언이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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